■ 1594년 3월
<제10화>

능주가 떡배와 함께 여막을 찾았을 때, 덕령이는 매형인 김응회와 여막 안에서 이야기 중이었다. 둘의 이야기는 능주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주로 김응회가 말하고 덕령이는 듣는 편이었다. 지금 변란으로 나라가 위급한데 처남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김응회 말을 덕령이가 받았다. 마음이야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시묘살이 중이지 않습니까?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했는데, 시묘살이가 중한가? 처남이 출전한다면 우리 빙모님께서도 말리지 않으실 거네. 병환 중에도 자네와 큰 처남의 봉기를 흔쾌히 허락하지 않으셨는가? 형님의 복수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응회의 설득에 덕령이는 고민하겠다고 했다. 한참 설득하고서 김응회는 다음에 또 오겠다며 여막에서 나왔다. 사모관대 차림의 김응회가 목화를 신고 여막을 나서자 능주가 덕령이의 여막 앞에서 말했다.

  “나리, 잠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능주 말에 덕령이가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떡배에게 눈길을 던지고 입을 열었다.
  “옆에는 뉘신가?”
  “이번 변란으로 부모님이 왜군의 포로로 잡혀있는 떡배라는 자구먼요. 부산에서 여기까지 왔답니다요.”
  “부모님이 포로로 잡혔다고?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얼른 들어와서 자세하게 얘기 좀 해보게.”
 
 덕령이는 곧 방에서 나올 기세였다. 부모님이 포로로 잡혀 있다는 말이 그의 효심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능주는 떡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분의 차이를 잊은 듯 떡배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밖에 서 있을 때는 제법 따가운 날씨였지만 방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덕령이는 상복 차림으로 방에 앉아 있었다. 사향을 구하러 추월산까지 오게 된 이유까지 포함해서 능주가 떡배 사연을 요약해서 전했다. 덕령이는 혀를 끌끌거리며 듣다가 따뜻한 위로의 눈길을 건넸다.
  “나리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향노루를 잡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나리께서 사향을 좀 구해주시면 어떨까 해서유.”

  능주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덕령이는 자주 사냥을 나갔기에 사향노루를 잡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덕령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능주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을 꺼낸 건 덕령이의 인품이었다. 대인관계도 넓었고, 수완도 좋았다. 덕령이라면 어렵지 않게 사향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산이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노비라지만 불혹이 넘었는데 기본적인 사리분별도 못하는 능주가 아니었다. 가난한 덕령이가 아픈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잡히지도 않는 고기를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물가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나, 3년 시묘살이를 하려는 것 때문에 그 효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짐작이 갔다. 그 정도 효심에다, 남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호방한 성격이라 떡배 사연을 듣고 어떻게든 도움을 줄 것으로 보았다.
  “가만있어라. 지난번에 누가 생향을 구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구먼. 내가 알아볼 테니 그건 너무 걱정 말게.”

  능주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잇속을 따지지 않고 발 벗고 나서려는 덕령이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은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생향의 가치를 몰라서일까. 생향이라고 뚜렷하게 말하는 걸 보니 나리가 생향의 가치를 모르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향은 3년 이상 자란 수컷의 음경 앞에 달린 주머니다. 사향노루는 사람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암벽지대에서 신선의 정기를 받으며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한 동물이다. 구하기 매우 어려워 어떤 이는 사향을 백 년 묵은 산삼이나 수십 년 묵은 백사보다 귀물로 여겼다. 사향은 생향, 제향, 심결향 세 종류인데, 겨울에 약효가 넘쳐나 봄에 저절로 떨어진 게 생향, 산채로 잡은 사향노루에서 떼 낸 것이 제향, 저절로 죽은 사향노루에서 떼 낸 것이 심결향이다. 약효는 당연히 생향이 으뜸이라 가장 귀하게 여겼다.

  석청을 따러 무등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석청을 찾아 암벽지대를 탐색하는데 독특한 향이 콧속을 훅, 파고들었다. 신묘한 향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향을 따라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기암괴석의 편편한 지점에서 탱자만한 작은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주워서 자세히 살피니 불투명한 막에 전체적으로 하얗고 노란 털이 나 있었다. 기다랗고 하얀 털도 몇 가닥 보였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향이 고급스럽게 느껴져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생각해 주인 나리인 첨정 대감에게 갖다 드렸다. 생향이랬다. 이렇게 귀한 생향을. 대감은 감격에 겨운 표정을 한참이나 지었다. 대감은 생향을 신줏단지나 되는 듯 소중히 다루며 향을 맡았다. 그리고는 다음날 임금에게 진상하겠다고 했다. 생향이 그렇게 귀한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떡배도 덕령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