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등에 얹힌 삶의 희비

예전에 봄,여름이면 텃밭이나 산밭의 장다리꽃에 그토록 많던 나비들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다 농약 살포 등으로 인한 환경공해 탓이리라 짐작되지만, 이러다가 지구상에서 나비가 사라질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 나비를 시로나마 한번 만나볼까요? 

먼저 김사인 시인의 <나비>를 소개해 드립니다.
김사인 시인은 1956년 충남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2년 <시와 경제>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등이 있고, 제50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 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 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 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김사인, 「나비」 

이 시를 읊조리다보면 저는 어리던 날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느새 한낮은 기우는데, 엄마 아빠는 다 들판에 일 나갔지, 형과 누나들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지, 아기만 혼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마루에 차려진 밥을 쥐어먹다가, 느닷없이 텅 빈 마당의 적막이 무서워서 씰룩씰룩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런 서러운 장면 말입니다. 물론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선 마당을 질러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봄날 말이지요.

우리는 가볍게 나풀거리는 나비의 모습에서 생의 환희를 읽거나, 나비 날개의 여러 색깔을 통해 화사한 꿈을 읽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인은 그 나비 등에서 “빈 집 마당 켠/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을 읽습니다. 혼자 남은 아기의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비어져 나오는 울음”을 읽고, “땟국물 같은 울음”을 읽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는 이 하나 없는 대낮의 “눈 시린 적막”을 또한 읽습니다. 어리던 날 우리는 늘 노동에 시달리는 부모 때문에 그렇게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비는 그 등에 가볍고 찬란하게 얹힌 생과, 소외와 적막으로 자리하는 슬픔이 꿈결같이 서로를 포섭하고 있는 형국으로, 인간 삶의 희비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 삶의 엄정함을 나비 등에 얹힌 그늘과 혼자 남은 아기의 울음에서 보았기에 시인은 “그 앞에 고요히/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열무꽃과 나비 이미지를 교직한 문태준 시인의 <극빈>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등이 있습니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문태준, 「극빈」

구례 섬진강가 폐교 사택을 얻어 2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농사꾼 출신이라 텃밭에 상추며 열무며 채소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런데 열무는 저 혼자 먹고 남아서 마을사람들에게 거저 솎아가게 해도 비 한 차례만 내리면 우쭐우쭐 자라버렸습니다. 어느 날 여행을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몇 번 먹지도 못한 열무들이 연보랏빛 흰 열무꽃을 온통 피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무꽃밭엔 나비 떼며 벌 떼가 잉잉거리며 그네들 사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미처 거두지 못한 열무밭을 나비며 벌 떼가 차지하고 있던 것입니다. 저는 그걸 바라보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싱그럽게 느껴졌었습니다.

문태준 시인도 저와 같은 경험을 시로 표현하고 있군요. 사람들이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고 놀리는 데서 알 수 있듯, 줄기와 잎 그리고 뿌리를 먹는 열무의 현실적 효용성을 ‘게을러’ 놓쳐버리고, ‘가까스로’ 꽃이라는 비실용적인 미적 가치를 얻습니다. 채소밭은 아름다움을 위해 가꾸는 것이 아니라 채소를 재배하여 먹기 위해 있는 공간인데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망설여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밭에 한 마리, 두 마리, 나비 떼가 나타나 앉아서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을 머뭅니다. 한마디로 열무꽃밭의 쓰임새가 전복되는 순간입니다. 열무꽃밭은 사람들에게 싱싱한 채소를 제공해주진 못하지만 나비 떼에게 깊은 휴식의 시간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결국 ‘나의 열무밭’은 ‘나비의 꽃밭’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편히 쉬라고 내준 ‘무릎’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열무꽃은 나비 떼에게 느슨한 휴식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열무밭에서 잎과 줄기, 뿌리만이 아니라 나비에게 꽃마저 잃은 셈이지요. 그러니 이게 ‘극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린 지독한 가난인 셈이지요.*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