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보가 임억령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김윤제는 고개를 들고 한참동안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양산보는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김윤제는 정암의 절명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석천, 절죽도 좀 보게. 대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김윤제는 양산보에게 절명시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벽에 걸린 절죽도를 보며 임억령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절죽도는 학포가 으뜸이지.”
임억령이 절죽도를 향해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양산보는 김윤제에게 정암 스승의 절명시는 깊숙이 감추어두었노라는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그는 오래 전에 김윤제로부터 절명시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될까 우려된다는 말을 듣자, 벽에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엎은 다음, 그 위에 벽지를 다시 도배를 해버렸다.    

셋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술상이 들어왔다. 오라버니가 절친한 친구까지 대동해온 터라, 김 씨 부인이 한껏 마음을 쓴 것이다. 그런데 술상을 들고 온 사람이 또바우네가 아니라 양산보한테는 사종누이가 되는 양 씨 부인이었다. 사종 누이는 4년 전에 창암촌 아랫마을인 성산동으로 출가했으나 1년도 안되어 남편을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양산보는 필시 그의 부인이 사종 누이한테 술상을 들여보낸 것은 다른 뜻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양산보의 아내는 부엌일을 도와주러 집에 자주 오는 누이를 볼 때마다, 청상으로 외롭게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자주해 온 터였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사종 누이는 이름 그대로 아침 이슬을 담뿍 머금고 피어난 연꽃처럼 자태가 청초하면서도 소담스러웠다.
“연향이 네가 어찌된 일이냐? ”
“예, 심부름할 아이가 밭에 나가고 없어서...”
연향은 낯선 남정네들 앞이라 부끄러운지 얼굴조차 바로 들지 못한 채 술상을 놓고는 서둘러 뒷걸음으로 나갔다.         
“사종 누이입니다. 출가하여 일 년도 안 되어 남편을 잃고 윗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답니다.”  
양산보는 손님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나서 다소 어색한 듯 씩 웃었다.

세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행주가 시작된 지 한식경 후에 임억령이 동복에 가야한다면서 먼저 돌아가고 김윤제만 남았다. 김윤제는 누이동생과 조카들을 보고 싶다면서 안채로 향했다. 그는 마침 출타했다가 돌아온 창암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창암공은 김윤제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김윤제에게 양산보를 설득하여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양산보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김윤제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창암공의 부탁을 받은 김윤제는 양산보를 만나기 위해 다시 지넷등으로 내려와 대나무 숲 오솔길로 들어섰다. 김윤제는 양쪽에 담을 쌓고 말끔하게 정돈 된 개울이며 연못과 석가산을 보고 적이 놀랐다. 대봉대 옆에 있던 양산보가 김윤제를 발견하고 반달음으로 대숲 길을 내려왔다.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 봉황이 우니 아침해가 떠오른다고 했던가? 자네가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여기에 봉황이 깃들기를 기다리기 때문인가? ”
김윤제가 대봉대에 걸터앉아 벽오동나무 우듬지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말인지...”
양산보는 말 끝을 흐렸다.
“봉황은 성인의 탄생이나 임금이 치세를 잘하여 태평성대를 이룰 때 날아온다는 상서로운 새가 아닌가. 한 때 이 나라에도 봉황이 있었다네. 그런데 고려 때 지리산 천은사에 은거하던 봉황이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고 하지 않던가. 자네는 지금 고려조 때 사라진 봉황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겐가? ”
“원효대사님을 말씀하시는 겐가?”
“하기야 원효도 스스로를 봉황이라 생각했다지.”
“오늘은 사촌과 석천이 봉황이네.”
“허허, 내가 매제한테 봉황이라니 듣든 중에 반가운 소리구만.”
“나에게는 사촌이 대봉대에 처음 찾아든 봉황이라네.”
“진짜 봉황을 기다리는 건데 내가 잘 못 온 것은 아닌가.” 
“그럴리가.”
“이 사람아, 여기서 하늘만 쳐다보고 무작정 봉황을 기다린다고 해서 날아오겠나. 지금은 스스로 봉황을 찾아나서야 하는 세상일세. 자네가 누구관데 봉황이 예까지 자네를 찾아 날아오겠는가. 이러지 말고 나하고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세. 한양으로 가야 봉황을 만날 수가 있네.”
김윤제는 그렇게 말하고 매제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촌께서 아버님 부탁을 받으신 거로구만.”
“그렇다네.”
“그 이야기는 그만두세.”
“허허, 이 사람.”
“사촌께서는 부디 넓은 세상 마음껏 두루 돌아다니면서 이치를 깨닫도록 하시게. 나는 작은 골짜기에 납작 엎드려 바늘구멍으로 하늘 쳐다보듯 살면서 내 나름대로 사람 사는 법도를 알아보겠네. 종당에는 넓은 들판 개구리나 우물 안 개구리나 얻은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다 부질없는 일이네.” 
“할 말이 없구만.”

김윤제는 처음부터 매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일어서서 개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네 여기에 이덕유가 낙양 삼십 리 밖에 조성한 평천장을 본 따 그대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왕유가 세운 망천장을 만들 셈인가. 별서를 경영하려면 왕유를 본받아야한다는 말이 있지. 하기야, 여기라면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살기가 딱 좋겠구만.”

양산보의 귀에 처남이 자신을 조롱하는 말투로 들려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촌도 원, 숨어 살다니?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아버님께 불효는 하고 있지만 죄를 짓지는 않았네.”
“허면, 홀로 청한적막을 즐기기 위해서인가? ”
“나중에 내 뜻을 아시게 될 것일세.”
“그래 앞으로 어떻게 별서를 조성할 것인지 자네 포부를 한번 말해보게. 합당하다면 내가 매제를 도와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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