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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詩의 향기,삶의 황홀(21)

신성한 숲과 창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가을도 끝나갑니다. 이런 가을이면 역시 신성이 깃든 숲으로 가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취하고도 싶지요. 그래서 오늘은 고진하 시인의 <신성한 숲>이란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고진하 시인은 강원도 영월출생으로 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뒤 그동안 여러 시집을 내신 사제시인입니다. 시집으로 <얼음수도원> 등이 있습니다.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너에게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지.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너는 
전신의 빨대로 완숙된 포도주를 빨기에 
여념이 없었지. 
다복솔과 아카시아, 철쭉과 
자작나무, 시끄러운 지저귐을 멈춘 채 
한껏 몸을 낮추는 새들, 그들 
틈에 나도 끼어 그 극진한 공양을 받으며 
발그레 취기에 젖어들었지. 
잠시 후 보랏빛 어둠이 내리자, 너와 내가 
받아먹은 놀과 어둠이 
비빔밥처럼 안에서 비벼져 
이름 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지. 
이걸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시인은 이름 짓는 자가 아니던가?)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 
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을. 
                                                           -고진하, 「신성한 숲」 

  고진하 시인은 사제라서 그런지 시창작의 대부분을 일상의 성화(聖化)나 인간 내면의 신성 탐구에 바치고 있습니다. 일상의 성화란 밥 먹고 노동하고 사랑하고 이웃과 사귐을 갖는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신성의 임재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결국 성속일여(聖俗一如)라거나 "누구도 일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신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데, 이는 신의 외모라기보다 신의 속성을 받고 태어났음을 말할 것입니다. 신의 여러 속성 중 하나만 들면 창조성으로, 실제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만물의 이름을 짓는 자의 허락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관된 종교적 상상력을 통하여 성과 속의 통합 균형을 추구하고, 신성과 육체의 소통 화해를 꿈꾸며, 초월의지와 현실감각 사이의 접점을 찾는 화목제(和睦祭)의 시인이 고진하입니다.
  그의 「신성한 숲」에서 시적화자인 나는 "완숙된 포도주"와 같은 저녁놀을 공양 받고 있는 숲에 들어가 엄마젖을 빠는 아이처럼 그 숲과 그 숲 속의 나무와 꽃과 새와 함께 나도 힘껏 노을을 빱니다. 그 바람에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발그레 취기에 젖"습니다. 그리고 나와 숲과 노을과 곧이어 찾아드는 보랏빛 어둠은 이윽고 비빔밥처럼 하나로 비벼집니다. 비벼져서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그윽한 뭔가가" 되었는데, "위대한 밤의 동공인 부엉이와 별들의/반짝이는 눈동자 속에나/혹 새겨졌을지 모를 그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묻는 시입니다. 아마도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이라고나 불리거나 신의 오묘한 섭리에의 순응이라고나 불릴 그 이름을 여러분은 무엇이라 부르겠습니까. 

  벌써 낙엽이 거의 다 졌습니다. 이런 가을날 낙엽처럼 사라져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 <창>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시를 쓴 노향림 시인은 해남출신으로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그동안 여러 시집을 내셨습니다. 시집으로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등이 있습니다.

  <창>-노향림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그에게는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놓은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이 
전부였다. 

한평생 
그에게 시달렸던 쑥부쟁이 꽃들이 
따사로운 햇볕 속 
상장(喪章)들을 달고 흔들리는 

조객(弔客)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곳. 

  한평생 미국과의 전쟁과 혁명을 진두지휘했던 베트남의 해방자 호치민이 사후에 남긴 것은 그가 평소 입고 다니던 남루 한 벌과 지팡이, 그리고 평생 끼고 다녔다는 정약용의「목민심서」한 권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한데 여기 호치민 같은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평생 손바닥만 한 밭을 일구고 살던 김 스테파노라는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그가 운명 뒤에 남긴 것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그리고 전자시계가 전부입니다.
  아니 하나가 더 있는데 벗어놓은 그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가 전자시계를 통해 조금 빌려 쓴 시간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의 소유가 아니었으니 그가 남긴 유산 축에 낄 수 없습니다. 물론 시 문맥상 이런 것들은 유산으로 남겨졌다기보다 손바닥만한 밭으로 육신의 삶을 지탱하며 나머지는 십자고상 및 낡은 성경책과 더불어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기도에 침잠했던 그 고요와 적막의 삶, 아니 그런 삶 속에서 진정한 평화와 축복의 시간을 도모했던 그의 생을 상징하는 것일 겁니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었으니 그의 영혼이 나간 창문조차 하늘 쪽을 향하여 무심히 열린 채 덜컹거립니다. 생명체가 아닌 창문마저도 감응하여 덜컹거릴 정도면 그 창은 이미 하늘의 창에 다름 아닐 터이고, 물론 그 창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하늘에 무사히 가납(嘉納)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손바닥만 한 밭에서 잡초 취급을 받아 그의 손에 늘 뽑히고 말았을 쑥부쟁이마저 하얀 꽃을 피워 마치 상장(喪章)을 달기라도 한 듯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흔들거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마도 그가 간 곳은 조객이 필요 없는, 아니 죽음이 없이 영원히 평화로운 곳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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