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

  올 한해도 저무네요. 어느새 성탄절이군요. 그래서 오늘은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라는 따뜻한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종길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오랫동안 시를 써오신 분입니다. 『그것들』이라는 시집과 다양한 연구서를 생산하셨지요.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셨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 눈이 내립니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도시에 옛날에 내렸던 눈만은 다시 내립니다. 그 서느런 눈이 ‘나’의 이마에 닿자마자 문득 그 옛날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어두운 방 안에서 바알간 숯불’과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만이 열병으로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나’를 지키고 있는 중에, 약을 가지고 돌아오십니다. 그 약은 눈 속을 헤치고 따오신 ‘붉은 산수유 열매’로 해열제로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들뜬 얼굴을 부비며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이 되는데, 뒷문에는 계속 눈이 들이칩니다. 아마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를 그날의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것만 같은 ‘나’는 이미 그 옛날 아버지만큼의 나이를 먹은 아버지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시에서 형상화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대개 연인이거나 어머니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합니다. 이는 김종길 시의 뿌리를 이루는 것이 유가적(儒家的)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김종길 시인은 경북 안동이라는, 우리나라 유교사상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렬하게 남아 있는 지역 출신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시의  고전적 품격 등은 모두 유가적 덕목을 이루는 요소들이지요.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 주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그의 이런 근본에서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이른 화자는 '눈'을 매개로 하여, 어린 시절 열병에 시달리는 자신을 위해 눈 속을 헤쳐 산수유 열매를 따오시던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아버지는 부모의 은덕을 효로 보답해야 한다는 원리를 절로 떠오르게 하는 아버지이며, 화자는 그런 아버지로 표상되는 애정 넘치는 생활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시에서 바알간 숯불-붉은 산수유 열매-열로 상기한 볼-내 혈액 등으로 이어지는 붉은색 이미지는, 춥고 쓸쓸한 겨울 장면을 조성하는 흰색의 ‘눈’과 선연하게 대비되며 뜨거운 사랑을 상징합니다. 특히 그 눈을 헤치고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열매'가 화자의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는 것은 육친간의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사랑이 늘 하나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산수유 붉은 알알'은 화자의 내부에 생명의 원소처럼 살아 있는 사랑의 상징이 됨으로써 거룩한 '성탄제'의 본질적 의미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지요. 또한 붉은 산수유와 함께 화자의 열을 내리게 한 것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인데, 이는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차가운 옷자락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깊고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의 시간은 전후반부 모두 ‘성탄제 가까운 밤’입니다.
성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이지만, 여기서는 성탄제의 그런 피상적 의미를 벗어나 화자와 아버지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시키고 조명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제는 촛불과 캐럴과 산타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서구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아버지와 숯불과 산수유 열매 등의 한국의 전통적·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 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윤리관으로 대표되는 관습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한 차원 더 깊어진 애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26년 생으로 2017년 향년 90세를 기하고 세상을 뜨신 김종길 시인이 놀랍게도 ‘성탄제’라는 시를 쓴 것이 특이합니다. 더구나 유교적 전통 속에서 태어나 평생을 유교적 가치로 고매하게 세상을 사신 분답지 않게 외국 명절인 성탄제라니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서두에 언뜻 주어진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니라 김종길 시인은 영문학도로 평생을 고려대에서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분입니다. 그러기에 양반고장에서 태어났지만 젊었을 때부터 일찌감치 서양문물을 익숙하게 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 성탄제가 특별하게 시의 주제를 강화시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탄제라는 제목을  다른 걸로 바꾸어도 하등에 의미 손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런 모든 해석을 무화시킬 만큼 이 시는 아비의 자식에 대한 사랑, 나아가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이 시 전체에 아우라를 치면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육친적이고,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시의 성취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송구영신하십시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