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꿈, 소쇄원을 꾸미다(25화)

 옛날에 목화다래를 따 먹는다고 붙잡아서 두들겨 패주었던 그 아이들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지금은 목화밭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가난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들 아이들은 지난 날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몰래 목화다래를 따먹고 있지 않은가.

양산보는 가난을 대물림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고 아팠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대단위로 목화를 제배하여 그들을 일꾼으로 쓰고 있기에 품삯으로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 싶었다. 목화를 따먹다 산보에게 들켜 죽을뻔 했던 버들이도 그새 처녀가 되어 목화 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양산보는 목화밭에 나가지 않은 대신 오늘도 지석천 개울가에 나왔다. 일꾼들이 모두 목화밭에 나갔기 때문에 양산보 혼자 누각을 지을 터에 돌을 들어내는 일을 했다. 처남이 잡아준 자리에 누각을 지을 생각이다. 언제 누각을 지을 수 있게 될지는 모르나 미리 터라도 닦아놓고 싶었다. 그는 누각을 짓기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는 터였다. 집터를 닦는 일에서부터 목수를 불러오고 목재를 마련하고, 기와며 구들장을 준비하고, 문짝을 짜는 일 등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우선 집을 앉힐 두 곳에서 혼자 잔돌을 들어내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 돌을 들어낸 다음 바닥을 북돋고 다지는 일은 장정들이 아니면 어렵다.
 
아침부터 삼태기에 돌을 담아내던 양산보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개울로 내려가 노송이 휘움하게 굽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널찍한 바위에 벌렁 누웠다. 그는 김윤제가 시회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이곳을 평상바위라고 불렀다. 평상바위 아래는 앉아서 달구경을 할 수 있는 탑상암 (榻床巖)과, 그 옆에는 여름날 다리를 쭉 펴고 누워서 물소리를 즐길 수 있는 와암(臥巖)이 있다. 양산보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소리가 더욱 명징하게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바람 소리도 쒜쒜쒜 소리를 내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전 처남 김윤제가 그에게 했던 말이 대숲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되살아났다. 무작정 봉황을 기다린다고 해서 스스로 날아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봉황을 찾으려면 한양으로 올라가자고 했던 처남의 말이 귀청 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양산보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은 봉황이 없는 대신 온갖 잡새들이 몰려들어 서로 잘났다고 시비를 일삼는 곳이 아닌가. 정암 스승이 그랬듯이 그도 한 때는 임금을 봉황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색깔만 봉황이었다. 기반 없이 옥좌에 오른 중종은 훈구파에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사림파에 힘을 실어주었다가, 사림파가 강해지자 이번에는 사림파를 치고 다시 훈구파를 끌어안았지 않았는가.

임금은 왕권을 다지려는 목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저울질 놀음을 즐기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런 임금을 철석같이 믿었던 정암 스승이 참으로 억울하게 생각되었다. 이런 임금의 세상에 봉황이 날아올 수 있겠는가. 양산보는 어쩌면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치세(治世)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그런 세상이 그리 쉽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기다림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봉황이 날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다림만이 스승의 뜻을 받들고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원림을 가꾸고 유학을 연마하며 오직 봉황이 깃들기는 기다리며 사는 것이 그에게는 낙이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자 양산보는 원림 안 빈터에 나무를 심었다. 먼저 석가산에 매화며 동백, 목련, 석류나무 등을 심고 입구 쪽에는 불두화와 살구나무도 심었다. 그날 양산보는 하인 또바우와 함께 언덕 아래에 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무를 심고 계시는 군요. ”
문인주가 양산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금 내가 심은 이 나무는 아직 보잘 것 없으나 훗날에 사람들이 이 나무 그늘로 찾아들게 될 거요. 나무를 심는 마음은 당대보다 후대를 위한 것이지요. 후대 사람들이 나무를 심은 선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겠지요. 어쩌면 사람을 가꾸는 것 못지않게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지요.”
“지금 심은 것은 무슨 나무지요?”
“이건 회화나무요. 나무도 사람모양으로 저마다 품성을 갖고 있다오. 그러니 말을 못하는 나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요.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최고의 길상목으로 쳐서, 집 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부자가 될 뿐만 아니라,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오. 또한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잡귀가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하였지요. 신목으로 귀하게 여겨 고을 원님이 새로 부임할 때는 오래된 회화나무에 제사를 지냈지요. 그뿐 아니라 집 안에 이 나무를 심으면 부부금실이 좋고 백년해로한다고 전해지고 있다오. 그래서 이 나무는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으며 선비집이나 서원, 절집, 대궐에만 심도록 했답니다. 부모나 훈장이 쓰는 회초리는 회화나무지요. 회화나무 가지로, 종아리를 치면 기가 살아난다고 합니다. 과거급제 때 임금이 하사하는 어사화가 바로 이 회화나무 꽃이랍니다. 또한 옛날에 큰 스님들이 회화나무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회화나무 베개를 베고 자면 머리가 맑아져 견성을 하게 된다고 해서, 절집에 많이 심었답니다. 부귀영화는 한갓 봄날의 꿈과 같다는 ‘남가일몽’의 고사도 회화나무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은나라 곽자의라는 사람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회화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죽은 노모가 나타나 아무 달 아무 날에 저자거리에 나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니 그리 하라고 일러주더랍니다. 그대로 하자 그는 왕을 만났고 발탁되어 은나라 명재상이 되었답니다. 중국에서는 재판관이 재판에 임할 때는 반듯이 회화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답니다. 회화나무는 한 여름에 새로 자란 가지 끝에서 연한 노란빛의 꽃이 피지요.”
“처사님이 회화나무를 심은 뜻은 가문의 번창을 위해서입니까. 부부의 백년해로를 위해서입니까? ”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후세를 위한 마음이 더 크지요. 그리고 나는 나무를 심을 때마다 각기 그 나무가 갖고 있는 품성을 마음에 새긴답니다. 사람도 그렇듯이 나무라고 다 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저마다의 품성을 알고 나면 나무와 가까워지게 되고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나무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 가까워진다는 뜻이지요. 사람이나 나무나 다 마찬가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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