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의 피로인
양진영 작가담양뉴스는 2019년 창간4주년 기념 『기획연재Ⅲ/소설』로 ‘2019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자인 양진영 작가의 걸작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을 연재중입니다.
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제7회 송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조선왕조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후손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양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월2회 가량 지면을 통해 연재중입니다. / 편집자 주.
--------------------------------------------------------------------------------------------------------

<41화> 허허실실

야스모토는 오늘도 무언가 궁금했는지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독서에 열중이었다. 몽린을 보자 늘 그렇듯 웃음 띤 얼굴로 맞았다. 본디 성격이 유순하고 말이 느긋한 탓인지 무장치고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장점을 가졌다. 스무 명이 넘는 조선인이 집단으로 탈출할 줄은 꿈도 꾸지 못한 듯 부드러운 말투로 몽린을 맞았다.

“여기 오기 전부터 그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문장이 있어서 불렀네.”
“알겠습니다. 무슨 문장입니까?”
“우선 바둑이나 한 판 두면서 천천히 이야기할까. 오즈성에서 그대와 두던 바둑 놀이가 꽤 재미 있었지.” 야스모토는 말하면서 시동에게 턱짓했다. 어린 시동이 재빨리 바둑판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바둑은 주나라 때부터 있어서 일본에도 오래 전에 전래됐다.

무장도 곧잘 바둑을 두는데 야스하루가 바둑을 몰라서 가신도 별로 두는 사람이 없었다. 몽린은 어려서부터 소쇄원에서 작은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서 꽤 잘 두는 편이었다. 어느 날 야스모토는 몽린과 바둑을 한 번 두더니 체질에 맞는 듯 수시로 들러 기보를 익혔다. 바둑에 능한 공자님이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 라는 고사를 들려주었더니 야스모토는 공자 흉내를 내려는지 바둑에 열광했다.  두 사람은 옛 이야기를 하면서 두어 판을 대국했다. 야스모토는 연신 땀을 닦으며 가끔 아하! 한 수 배웠다는 듯 감탄을 연발했다. 몽린은 한 번 이기면 다음에는 지고 진 다음에는 다시 이겼다. 야스모토는 이길 때는 물러 달라는 말이 없는데 지고 있을 때는 예닐곱 차례나 무르자고 했다. 야스모토는 하수인 탓에 수가 약해 기보에도 없는 바둑을 제멋대로 두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둥이 같아서 예측이 어려웠다. 그런 때 몽린은 부러 지려고 몇 차례나 물렀다. 생각해 가면서 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야스모토는 상대방이 뻔히 내다보는 것도 모르고 오른쪽 귀로 치고 들어가서 기를 쓰며 덤볐다. 전쟁터라면 목이 날아간 줄 모르고 손으로만 칼을 휘두르는 셈이네…….몽린은 쩔쩔매는 야스모토를 말렸다.
“그렇게 두시면 돌이 살지 못합니다.”
“어서 두어 봐. 여기서 이길 테니까.”
“차라리 물러 달라고 하시지요. 이처럼 싸움의 기본을 무시하시면 결토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야스모토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아닌 척 표정은 태연했지만 심중의 격한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오즈성에서는 주군이라고 너나없이 굽신대는데 고작 납치돼 온 조선인 주제에 이죽대니 화가 날 법했다. 그러나 어쨌든 한때 유학을 가르쳐 주었고 지금도 배우고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좋아. 한 수 무르지.”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바둑에서는 자신보다 상대방의 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맞아.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본디 성격이 유순한 야스모토는 선선히 물러섰다. 바둑을 물리고 나자 옆에 놓아 둔 책을 펼쳤다. 
“나는 중용을 배울 때마다 이 구절이 어렵단 말이야. 도대체 공맹의 다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말이야. 기실 지난해 오사카 싸움에서도 나는 이 문장을 들먹여서 히데요리 편을 들려는 아버님과 가신을 설득했거든.”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유자, 히데요리가 싸웠던 오사카 싸움에서 야스하루는 평생의 주군이었던 히데요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논리로 오사카에 일부 군사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막부의 승리를 확신한 야스모토는 참전하지 않도록 아버지를 설득했고 자신이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부 편에서 싸우는 척 흉내만 냈었다. 몽린은 야스모토가 내민 책에 적힌 구절을 찬찬히 음미했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