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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천년 특별기획Ⅲ / 담양의 마을(2)-담양최고 부촌 남촌마을

담양의 최고 부촌이었던 ‘남촌마을’

일정시대 담양군 최초로 ‘전기’ 들어왔던 부자마을
정씨·국씨 가문 대가집에 소작농과 식솔들 얹혀살아
참사·감찰 관료 이어 해방 후 초대 국회의원 배출
관어공원 ‘호국사’ 남산에 최초 개원, 통째로 옮겨 가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이번호에는 <담양의 마을탐방>  ‘담양읍 남촌마을’ 편을 게재합니다.
이번호 <담양의 마을탐방> ② ‘담양읍 남촌마을 편’ 에서는 마을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마을의 자랑과 인물, 그리고 마을의 유래에 대해 들어보고 답사해 지면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남촌마을 전경

담양읍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보며 우뚝 서 있는 ‘남산’.
그 산 아래 어느 때 부턴가 하나 둘씩 집들이 들어서 마치 남산의 줄기가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듯 자리잡은 ‘남촌마을’은 행정구역상 담양읍 남산리에 속한다.
마을이름 ‘남촌’은 우리의 가곡에도 나오는 정겨운 고향마을의 대명사 여서 왠지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하는 마을명이다.
정서적 느낌상으론 초가집에 호박넝쿨 담장이 아련히 그려지는 정겨운 고향마을 같지만, 이와는 달리 담양읍 ‘남촌마을’은 과거 한집 건너 고래등 같은 대가집이 줄줄이 자리했던 부자마을 이었다. 그것도 담양에서 가장 부자촌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됐던 마을이었다.

 

▲마을이야기를 들려주신 남촌 어르신들

“당시에 담양읍에서 가장 먼저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어∼. 그만큼 남촌이 부자촌 이었제∼. 일정때 마을 앞 미리산쪽에 미곡 도정공장이 있었는디, 쌀 도정 헐라믄 전기가 필요허잖여, 근께 거기 도정공장에 전기가 들어오니께 우리 마을 정 참사댁 하고 국 감찰댁이 거기서 자기들 집으로 전기를 끌어왔어, 당시에 최고 부자인께 담양읍에서 제일 먼저 전기를 끌어다 썼제에∼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어도 마을사람들은 다 가난혀서 기냥 호롱불 키고 살았제~”
(*참고=일제때 미리산 미곡 도정공장은 해방 후에도 농협의 나락(벼)을 도정하는 유진공장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래인보우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들이 일정때 담양 최고의 부촌 남촌마을에 대한 자랑과 이 마을 부자 정 참사댁, 국 감찰댁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어르신들이 들은 이야기와 직접 목격한 이야기로 전해주는 남촌마을에 대한 자랑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략 1930년대로 추정되는 시기에 남촌마을은 담양읍 최초로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정 참사(참사 정용인) 가문과 국 감찰(감찰 국언진) 가문에서만 그 혜택을 누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이 마을은 두 가문 외에는 식솔들이거나 대부분 소작농들이 살던 마을이었고, 인근 미리산마을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으며, 그나마 남촌에 와서 머슴 또는 소작농으로 근근히 얹혀살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시 남촌마을은 정 참사댁과 국 감찰댁 가문만이 있고 나머지 마을민은 그들 가문에 줄을 대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더부살이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만석꾼 거부 정 참사 댁(宅)
추수철이면 세경 내는 소작농 줄이어

만석꾼 정 참사댁(집터)

실제, 당시 담양읍 최고 부촌이었던 남촌마을의 정 참사는 담양뿐만 아니라 근동의 외지에도 농지를 많이 소유한 만석꾼으로 추수철이면 순창,장성,광주 등지에서 세경을 내려고 남촌으로 오는 소작농들이 줄을 섰다고 전해지며, 남촌과 미리산 마을사람 중 몇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정 참사댁에 얹혀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같은 부(富)로 정 참사댁은 1930년대로 추정되는 당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여러채 있었으나 6.25전쟁 이후 후손들에 의해 재산이 흩어지면서 광주의 모 한약방에서 정 참사댁 고택(古宅)을 통째로 뜯어 갔다고 한다. 현재 그 집터의 흔적이 남촌마을 서광태 이장집(남촌산장)에 남아있고 정 참사의 공덕을 기린 시혜비가 종대삼거리 당간옆에 서있다.
 

●감찰을 지낸 국언진 가문
권력과 부(富) 거머쥔 담양의 유지

감찰을 지낸 국언진 본가

이와함께 남촌마을 부자집의 쌍벽을 이룬 국 감찰댁은 바로 감찰을 지낸 국언진 씨로 정 참사댁에 버금가는 대가집 부자였다고 한다. 국 감찰은 관료로 출세해 권력과 부(富)를 한꺼번에 쥐어 당시 담양읍내에서는 감히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자손들은 대부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세 아들 모두 교육계로 진출했는 바, 큰 아들은 담양중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국순옥 씨로 알려졌다. 둘째아들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재원이었고, 셋째아들은 순천에서 역시 학교 교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국 감찰대 고택(古宅)은 지금도 남촌마을에 장남과 차남이 살던 집이 일부 남아 있으며 장남 국순옥 씨의 손자 며느리(큰아들 국정표 씨의 아들 며느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국 감찰에 대한 이야기는 종대삼거리 당간옆 비석(불망비)에 일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초대 국회의원 정균식 씨 배출
 관어공원 ‘호국사’ 최초 창건한 곳
 서광태 이장 부친이 평생 일군 ‘남촌산장’

정균식 초대 국회의원 본가

이외에도 남촌마을에는 해방후 초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균식 씨가 일가를 이루었다.
정균식 의원댁은 남산리 150번지로 현재 이 마을 서광태 이장 부친이 생전에 살던 집이 바로 그 자리이다. 지금도 지붕 기와를 제외한 기둥,대들보 등 가옥의 틀은 예전 그대로 남아있다. 정균식 의원은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으나 오래전에 집을 처분하고 서울로 이사해 지금은 마을에 자손들이 없다.
정균식 의원댁 바로 윗편에 해방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호국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이후에 사찰 건물을 통째로 뜯어 지금의 관어공원 내 호국사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이 호국사 터는 수십년간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몇 년전 서광태 이장이 그 자리에 새집을 지어 살고 있다.

서광태 이장 댁은 현재의 ‘남촌산장’ 음식점으로 동생 서광균 씨가 오랫동안 ‘남촌산장’을 운영해 오다가 지금은 쉬고 있으며 서광태 이장이 2007년 무렵 서울에서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낙향, 동생과 함께 부친이 평생 가꾸어 놓은 집에서 살고 있다.
서광태 이장의 부친 서이태 씨는 해방 후 초대 담양 읍의원을 지냈으며 농민협회 대표로 농촌활동에도 열정을 가져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으며 이로인해 6.25때 빨갱이로 부터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는 초상화를 잘 그리는 재능을 갖고 있어서 담양을 비롯한 순창,남원,광주 등에 사는 부잣집 어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많은 돈을 벌게 돼 평생의 꿈인 지금의 ‘남촌산장’ 18,000평을 일구었다.
남촌산장은 자수성가한 서이태 씨가 인근의 집을 하나 둘 사들여 모두 6집을 합병한 1천여평의 대지에 잘 가꾸어진 정원과 함께 저택 주변에 17,000여평의 대나무숲과 임야를 보유하고 있다. / 장광호 편집국장

 

■ 남촌마을의 유래
남촌마을은 담양군 동북면 남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남산마을’ 또는 ‘남촌마을’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의 통폐합 당시 동정리 일부를 병합해 남산리로 명명하고 담양읍에 편입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전씨가 집성촌을 이뤄 60여 가구가 거주하며 ‘전촌(全村)’ 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지며 지금의 남산리로 불리기 전에는 ‘효자리’ 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효자비 설화(밤마다 남촌마을 부자에게 마실 다니는 홀어머니의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는 효자아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마을이며 조선조말 이후 해방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담양읍의 부촌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뒷산인 남산은 조선시대 금성산성의 내성 안에 있던 대장청에서 볼 때 남쪽에 있다해서 ‘남산’이라 이름했으며 ‘옥녀봉’ 으로도 불렸다. 당시 남산에는 대장청의 제1봉화대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봉화대를 재현해 놓고 있다. 담양군은 남산 정상에 팔각정을 지어 담양읍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마을 앞 들판에 오층석탑이 있고 그 남쪽에 ‘동정사’ 라는 절이 있었으나 약 200년 전에 금성산성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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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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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재은 2022-01-05 18:24:32

    기운이 좋아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도 좋겠다했었는데 역시나 훌륭한 역사와 가문이 있는 마을이였군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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