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꿈, 소쇄원을 꾸미다(26화)

양산보는 회화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주었다. 문인주는 양산보가 나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적이 놀랐다. 그가 원림을 가꾸려고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는 만큼 관심이 가고 관심이 가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살구나무는 학문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나무이고 소나무는 지조와 충절을, 측백나무는 겉과 속이 같은 군자의 나무라는 뜻이 있다오. 또 복사나무는 이상세계를, 매화나무는 군자의 고결함을, 산수유나무는 자손 번창을, 은행나무는 악정을 경계하고, 앵두나무는 형제간에 우애를 위해서 심지요. 단풍나무는 색이 여러 가지로 변해서 변절의 나무라고 집 안에는 심지 않으나, 나는 이 원림에 단풍나무도 몇 나무 심을 생각이오. 잎이 작은 아기단풍나무는 색이 짙고 밝아서 허전하고 적적한 가을날 바라보면 다소나마 위로가 되지요.”
“그런데 왜 나뭇가지를 다 잘라버리고 몸통만 심으십니까? ”
“고통을 주기 위해서지요. 나무가 여기서 두 번째의 생을 잘 살아가려면 큰 고통을 이여내야하지요. 손발이 잘린 고통을 이여내야 강해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랍니다. 고통을 피하려하지 말고 이겨내야만 강한 사람이 되지요. ”
“선비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
“나는 나무를 차별하지 않는다오. 좋아하고 싫어하는 나무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나무도 사람과 같은 점이 많답니다. 많이 흔들릴수록 뿌리가 튼실해지는 것은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지요. 또 죽으면 둘 다 흙으로 돌아가고, 햇빛과 물이 없으면 죽게 되고, 자신을 불태우고 희생해서 남을 돕고, 크거나 작거나 각기 용도가 있고....우리는 굽은 나무를 못생긴 나무라고 하고 곧게 뻗은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하지는 않지요.”
 그날 양산보는 또바우와 함께 종일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고 난 해거름에 양산보는 또바우를 시켜 첫째 자홍과 둘째 자징을 데려오도록 했다.
“자홍아, 아비가 여기 심어놓은 이 은행나무는 자홍 네 나무이니라. 그러니 앞으로 이 나무를 각별히 사랑하여 잘 가꾸도록 하거라. 이 은행나무는 네가 죽은 후에도 이 자리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리 가까이 와서 네 나무를 한번 쓰다듬어 주거라. 그러고 이 후담에 아름드리 나무로 크면 한번씩 안아주고 귀를 바짝 대고 나무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듣도록 해라.”
자홍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키보다 두 배 쯤 큰 은행나무를 만져보기도 하고 한참 귀를 대보기도 했다.“
“아버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데요? ”
자홍이 은행나무로부터 귀를 떼며 물었다.
“아직은 네가 은행나무와 친해지지 않아서 그런다. 앞으로 친해지면 숨소리도 들을 수 있고 서로 이야기도 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자홍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양산보는 둘째 자징도 회화나무 가까이 데리고 가서 지홍한테 했던 대로 시켰다.   
 문인주는 나무 심는 것을 구경하다가 장끼가 꺽꺽 울며 날아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스레해진 대숲 쪽에서 바람소리가 삽삽하게 들려왔다. 대나무 우듬지가 일제히 일렁이면서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조금조금 속삭이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내내 양산보가 해준 나무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마을에 들어서자 최 선생 집 마당에 마을 사람들 네댓 명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문인주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전거 딸딸이를 다급하게 울리며 마당 안으로 내닫았다.
“글세, 최 선생이 남도마당 앞 큰 도로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드라고 안 허요. 우리 집 양반이 차에 싣고 보건소로 갔더니 탈진했담서 주사 한 방 맞춰줬다고 헙디다. 쫌 전에 콩죽 쒀줬더니 한 대접 다 묵고 시방 잠들었다니께. 헌디 최 선생 뭔 일 있다요? ”
이장 부인이 문인주에게 바짝 다가서며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진주가 집을 나가서 며칠 째 찾아댕기고 있답니다요.”
“진주라니?”
“검둥이요.”
“마누라가 집을 나간 것도 아니고 그깐 개새끼가 나갔다고 탈기 헐 정도로 찾아 쏘댕기다니... 저러다 병나게 생겼구만.”
“진주는 보통 개가 아니랍니다. 최 선생님 사모님 돌아가시고부텀 식구처럼 십년 이상을 같이 살았으니께.”
“그래도 개새끼는 개새끼제.” 
문인주는 툽상스러운 이장 부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무릎걸음으로 마루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보았다. 최 선생은 뒷문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최 선생은 오늘도 진주를 찾아 인근 마을을 헤맨 모양이었다. 정말 이러다가는 큰 병이 날 것만 같아 걱정이다. 그는 한참동안 잠든 최 선생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려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갔다. 그는 최 선생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꿈에서 만난 양산보 이야기도 해주고 싶었고, 양천경 양천회 두 명의 손자가 왜 송강 때문에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는 집에 가서 허드레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올 생각으로 일어섰다.
 문인주가 집에 돌아오자 검둥 강아지가 꼬리를 치고 앙칼스럽게 짖어대며 반겼다. 그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강아지 사료부터 주었다. 문인주는 강아지 사료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러다가 정이 깊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몇 년 동안 같이 살아 정이 깊어지면 그 자신도 최 선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정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 정이 깊게 들면 떼지를 못했다. 정이란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뜨거워져서 자칫 마음에 화상을 입기 십상이다. 기실 그가 아내를 잊기까지 수년 동안 몸살을 앓아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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