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의 피로인
양진영 작가담양뉴스는 2019년 창간4주년 기념 『기획연재Ⅲ/소설』로 ‘2019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자인 양진영 작가의 걸작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을 연재중입니다.
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제7회 송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조선왕조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후손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양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소쇄원의 피로인’은 월2회 가량 지면을 통해 연재중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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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허허실실

▲ 양진영 작가

‘군자는 현재의 상황에 따라 행한다. 오랑캐의 땅에서는 오랑캐의 법도대로 행하고 환난을 당하면 환난에 처한 대로 행하나니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깨달아 얻어내야 한다(君子素其位而行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그 말은 자신의 잣대로 매사를 재지 마라는 뜻이다. 부딪친 상황에 따라 물 흐르듯 변화해서 거기서 무언가를 깨달아야 현자라는 말이다. 몽린은 중용의 그 구절만 떠올리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말한 그 명문은 같은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맹자의 사생취의와 정반대의 가르침이다.

인의예지신을 기본 덕목으로 삼는 유교는 믿음과 의리를 목숨보다 귀히 여긴다. 환난을 당하면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오랑캐의 땅에 가서도 올곧은 예의와 법도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뛰어난 유학자인 자사는 왜 환난을 당하면 환난에 처한 대로 행하라고 했을까? 
그 말은 강한 적이 쳐들어오면 냉큼 주인을 버리고 적장을 섬기라는 것 아닌가. 오랑캐의 땅에서 오랑캐의 법도를 따른다면 몽린도 조선에서 배워 온 유교의 도덕률을 버리고 일본의 관습을 따라야 했다. 그처럼 세상의 변화에 순응해 사는 사고방식을 여세추이라 하여 유생들은 경멸했다. 몽린은 숙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도 깨닫지 못한 가르침을 남에게 알려 줄 수 없었다. 야스모토는 책의 내용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도 몽린과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운지 목소리가 맑았다. 

“내 생각에 이 가르침은 만백성의 교리와 사고방식은 제각각이니까 한 가지에 집착하지 마라는 뜻이야. 부처님도 독선적인 교리의 위험성을 경계하셨지. 그래서 강을 건넌 뒤에는 배를 불태우라고 하셨어. 한사코 배에만 올라 있으면 땅을 못 밟으니까. 중용의 그 구절도 같은 원리야. 유교의 성인도 사람들이 너무 교리에 매달리면 독이 된다고 본 것이야. 그래서 환난을 당하면 환난에 처한 대로 행하라고 하셨을 것이야. 또 무어라 했지?”
“군자는 오랑캐의 땅에서는 오랑캐의 법도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조선인은 우리 일본을 오랑캐의 땅이라고 부른다지? 그렇다면 그대도 여기에 와서 그대가 좋아하는 맹자나 자사의 말씀을 받들어 오랑캐의 관습을 따르고 있었나?”
“…….”
“그렇다면 아버님이 하사한 히메도 아내로 맞았어야지”
오래 전의 이야기가 나오자 몽린은 오싹한 느낌이었다. 일본에서는 승려도 혼인을 해서 자식을 기를 수 있다. 또 영주는 자신이 거느린 첩을 가신에게 주어 아내로 삼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 10여 년 전에 야스하루도 자신의 젊은 첩인 히메를 몽린과 혼인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자라, 아직 유교의 사고방식이 몸에 밴 몽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가신이라면 넙죽 절하며 아내로 맞았겠지만 몽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거절했었다.
“아무리 성현의 말씀이 옳다고 부도덕한 행위까지 옳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겠지. 사람보다는 교리가 더 소중한 그대 같은 조선의 유생에게는 말이야. 그 부도덕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대가 배운 교리와 몸에 밴 풍습만이 유일한 것도, 올바른 것도 아니야. 교리보다 사람이 소중한 자사의 눈에는 그대가 히메를 아내로 삼는 일이 부도덕하지 않을걸.”
“일본인도 유학을 배운다면 그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 쉬이 생각하고 있어. 모든 사람은 유교 같은 교리를 통해서 선하게 바뀔 수 있다고 보는 듯한데 천만의 말씀이야. 그것을 깨달은 자사는 오랑캐의 땅에서는 오랑캐의 관습을 따르라고 가르쳤던 것이야.”
몽린은 약간은 의아하고 약간은 놀란 눈으로 야스모토를 쳐다보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몇 년간 못 본 사이에 그의 학문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그가 에도의 영주들 사이에서 교양인, 무가 제일의 시인이라고 불린다고 들었는데 허튼 말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공자님이 그대를 시험하러 여기로 보냈는지 모르겠구먼. 맹자나 자사 같은 분도 그 중용의 가르침을 깨달아 성인의 반열에 올랐을 법해. 부처님도 불립문자, 이심전심이라 하여 글이나 서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으라 하셨지. 서책을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라는 뜻이야. 그대도 오랑캐의 풍습을 거리낌없이 따랐더라면 훗날 공맹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앙 받았을 터인데. 흐흐.”
야스모토는 몽린과의 논쟁이 즐거운지 농까지 곁들였다. 일본의 영주는 늘 근엄한 얼굴로 가신을 대해서 웃음기가 없다. 한데 야스모토는 어딘가 일본인 같지 않았다. 그의 웅숭깊어 보이는 눈길을 볼 때마다 몽린은 운 좋게 좋은 일본인을 만났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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