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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27)문순태 작가

네 번째 꿈, 내 사랑 자미화
(제27화)

양산보가 두 아들과 아내를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양산보는 의관을 갖추었고 아내는 쓰개치마로 머리를 둘러썼으며 두 아들들은 남바위를 썼다. 정월초하루. 양산보 내외는 아침나절에는 집에서 세배 손님을 받고 오후 느지막이 성안마을 처가로 세배를 가는 길이다. 백일을 보름 앞 둔 셋째는 추위에 고뿔이라도 들까봐 집에 두고 두 아들만 데리고 나섰다. 외가에 간다니까 여섯 살 큰 아이가 반달음으로 저만큼 앞서 지넷등을 내려가자, 네 살짜리 둘째도 형을 뒤따라가느라 폴짝폴짝 뛰었다.

아침부터 찜부럭하던 하늘이 두꺼워지면서 바람도 드세어지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는 해지기 전에 돌아오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언덕배기에서 내려와 증암천 노둣돌을 건널 무렵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논둑길로 접어들자 칼바람이 한결 드세어졌다. 양산보는 두툼하게 솜을 넣은 바지저고리를 입어서 그런지 별로 추운 줄을 몰랐으나, 그의 아내는 상반신을 떨며 한사코 몸을 움츠렸다.
 
설날을 맞은 처가는 그의 본가보다 한층 더 많은 식구들이 모여 북적거렸다. 장인은 슬하에 7남4녀를, 장인의 동생 감은 2남 2녀를 두어, 두 형제와 그 자식들 수만도 15명이 되었고, 며느리, 사위, 손자들까지 모았으니 그 큰 집안이 가득 넘쳤다. 양산보 내외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큰 사랑으로 나가 먼저 처조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50년 전에 광주에서 처가 동네인 이곳 성안마을에 와서 처음 터를 잡았던 처조부 김문손은 이제 70이 다 되어 오래전부터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온 지 50년 만에 부자가 되었고 둘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자손들이 번성하고 가세가 날로 융창해졌다.
 
처조부는 손녀사위를 맞아 벽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세배받기를 거절했다. 양산보는 작년 설에도 와병중일 때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처조부께는 세배를 올리지 않았었다.
“그래, 양실이 너는 또 아들을 낳았담서?.... 잘...했느니라. 아녀자는 그저...자손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기중 잘한 일이여.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 줄... 모르거든.”
처조부는 말 하는 데도 힘이 겨운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처조부는 손녀를 양실이라 불렀다. 본디 이름은 김윤덕인데 양씨 집 사람이 된 후로는 양실이라 불렀다. 양산보 내외는 다시 옆방으로 갔다. 큰 사랑에는 방이 둘 있어 처조부와 장인이 사용했고 방이 여럿인 작은 사랑은 처남들이 썼다. 장인은 사위 내외와 외손자들이 온 것을 알고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세배를 받았다.
“윤제한테 들으니 과거는 영 포기했다면서?”
장인은 아직도 사위를 만나면 과거 이야기부터 물었다. 장인 역시 양산보의 아버지처럼 사위가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장인한테서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었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가볍게 미소만 떠올렸다.
“하기야, 자네는 굳이 벼슬을 살지 않아도 명성이 후대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했으니...”
장인은 그렇게 말하고 사위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양산보는 장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자네 혼서지가 들어왔을 때 원효사 스님께 가지고 갔더니, 그런 말을 하데. 이 사람은 벼슬길에 나갈 사주도, 부자가 될 사주도 아닌데도 후대까지 이름이 전해질 사람이라고 말일세. 어떤 일로 자네 이름이 남게 될지는 몰라도, 그 때 그 스님 말을 믿고 혼인을 승낙한 거였네.”
양산보는 그 말을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과거를 포기하게 된 것도 운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양실이 몸이 약하니께 잘 돌봐주게.”
장인은 그날도 양산보에게 몸이 약한 딸에 대해 당부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장인은 양산보를 만날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안방으로 가서 요기나 좀 하거라.”
장인은 딸을 향해 그만 나가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큰 사랑에서 나온 그들은 안방에 들어가 장모께 인사를 올리고 나자 푸짐하게 차린 음식상이 나왔다. 집에서 배불리 먹고 왔는데도 두 아이들이 상에 바짝 붙어 앉아 유과며 엿강정 등을 시샘하듯 먹어치웠다. 처가에서는 아이들이 많아 유과와 정과 외에도 과일 즙에 꿀을 넣고 조린 과편, 쌀가루를 꿀로 반죽하여 다식판에 박아낸 다식, 대추와 밤을 꿀에 조려서 만든 숙실 등도 푸짐하게 만들었다.  

작은 사랑에 있다가 따라 들어온 처남 김윤제가 술을 권했다. 국화주였다. 양산보는 국화주를 먹을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양산보가 글공부를 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기 전 해 가을이었다.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다가 김윤제가 잡아끄는 바람에 잠시 그의 집에 들렀다. 그 때 김윤제의 누이동생이 국화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대문 안에서 여동생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 하얀 산국을 촘촘하게 실에 꿰어 만든 목걸이의 색깔과 어울린 그녀 얼굴이 유난히 화사하게 빛나보였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김윤제 집에 와서 이 아이를 보았으나 그냥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지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날만은 느낌이 달랐다. 마음이 설레면서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김윤제를 따라 작은 사랑채로 걸어가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국화 목걸이 가까이 다가가서 이름을 물었다. 그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깊은 눈으로 김윤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때 김윤제가 가까이 와서 윤덕이라고 대신 이름을 말해주었다. 양산보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으며 김윤제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 때 양산보의 나이 열 네 살이었고 윤덕은 열 한 살이었다. 
 
김윤제는 이날 양산보가 계획하고 있는 원림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양산보 쪽에서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얼마 전에 하서 김인후를 만났는데, 담양에 내려와 계시는 면앙정 선생님을 찾아뵈러 오겠다고 하더구만. 그 때 자네를 만나러 찾아올 걸세.”
김인후라면 장성 사는 젊은 선비로 양산보 보다는 7살이나 연하이나 문장이 뛰어나 천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도 언제 면앙정 형님을 한번 찾아가 뵈어야하는데.....”
면앙정 송순은 양산보의 외종형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가 친 형님처럼 따랐다.
“언제 날을 받아서 우리 함께 찾아가 뵙도록 하세. 그 전에 동복으로 신재 선생님부터 인사를 올려야하는 건데...”
그 무렵 신제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제의 학문이 높아 호남 유생들이 모두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가며 동복 배소로 찾아갔다. 당시 전남에는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 학포 양팽손 등이 전국적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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