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와 왕년

장마가 끝나고 녹음이 한층 더 짙푸릅니다. 오늘은 이 녹음과 연관한 이시영의 시 <무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시영 시인은 1949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지금껏 『만월』 『바람 속으로』 『무늬』 등 많은 시집을 내신 분입니다.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이시영, 「무늬」 

 「후꾸도」,「정님이」 등 민중적 서사로 리얼리즘의 경지를 새롭게 개척한 시인, 그럼에도 처음 시조로 등단한 이력에 걸맞게 직관적 단시의 위력을 대 내외에 가히 번갯불처럼 각인시킨 시인이 이시영 시인입니다. 
 오늘의 시 「무늬」는 단 2행의 시임에도 아주 순결하기 짝이 없어 무기력과 불감증에 시달리는 사람 몇 명쯤은 다시 살려낼 것 같은 시입니다. 글쎄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대요. 그러면 의당 포도 위엔 그 잎새 그늘이 일렁이겠지요.
  저는 산책길이건 산행길이건 거기에 잎새 그늘이 일렁이는 걸 늘 보고 사는 사람이니까 그 그늘 무늬의 위력을 잘 알지요. 그런데 잎새 그늘 일렁이는 그 포도 위를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네요. 그러니까 잎새 그늘, 그 일렁임 속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 말이지요. 
  잎새 그늘의 일렁임, 일렁임! 아, 그 나뭇잎에 의탁한 일렁임의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그 누구든 순정이 없고도 일렁이겠습니까? 설렘이 없고도 일렁이겠습니까? 더더욱 떨림이 없고서야 어찌 일렁이겠습니까? 손끝만 살짝 닿아도 진저리를 치는 그 떨림들, 일렁임들! 
  
 그런데 그 잎새 그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답니다. '옛날에'요. 지금은 일렁임의 본질인 순수나 순정이나 순결 등 그런 것이 없겠지요. 아니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 하곤 뭔가 다르겠지요. 그래서 지금은 시인조차 그런 일렁임을 따라 갈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이미 돈으로 일관되는 게 자본 문명사회의 인간 모습이니까요. 그래서 '옛날에' 있었던 것이겠지요. 
  백과사전적인 시인 김지하는 이 ‘그늘’을 '예감이 가득 찬 숲 그늘'로 봅니다. 그 그늘은 '신의 뜨거운 숨결이 관통하고' 있고, '이 다음에 올 커다란 세상을 준비하고' 있고, '아침 땅이 내뿜는 저 하늘의 싱싱한 기운'이 심호흡하고 있고, 그 그늘의 '숲에 가면 오래 잊은 좋은 일'이 너무도 소박하고 굉장히 고귀하게 존재할 것만 같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모두 다 이시영의 시 구절을 인용한 찬사입니다만, 확실히 정자나무 그늘이나 아침 숲 그늘 등등은 뭔가 생성과 신비로 가득하여, 그 잎새 그늘의 무늬만으로도 사람은 참으로 찬란하고 깊어질 것만 같습니다. 나는 젊은 날 그런 잎새 그늘의 무늬를 가진 여인을 사랑한 적이 있답니다. 

  연일 무더위로 잠을 설치고 마을 당산나무 밑 정자에 나왔더니 마을 어르신 몇이서 왕년의 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원광대 교수인 강연호 시인의 <나도 왕년에는>이라는 시가 생각나서 여기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강연호 시인은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나 199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등이 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쥔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베인 눈시울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안에 털어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강연호, 「나도 왕년에는」

  우리나라 남자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왕년 이야기를 참 많이 하지요. 내가 한때는 몇 백억 굴리는 사업을 했다거나, 머리 쫙 빗어 넘기고 거리에 나서면 뭇 미인들이 사족을 못 쓰고 자기를 따랐다거나, 군수가 부임하면 맨 먼저 자기 집을 찾아왔다거나 하는 등의 왕년 자랑을 참 많이 합니다. 술에 취해 눈은 게게 풀리고, 입가엔 거품을 물고, 부르르 쥔 주먹을 자꾸만 하늘로 치켜 올립니다.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도 카페에 앉기만 하면 왕년 자랑을 참 많이 합니다. 내가 그때 주식해서 몇 십억 벌었을 때 손을 뗐으면 좋았을 것이라거나, 정부의 부동산 정책 때문에 사놓은 집 몇 채를 죽을 쑤고 처분했다거나, 남편은 국장되고 자식은 의사 됐는데 지금은 그놈들 코빼기도 못 본다거나 하는 등의 탄식을 합니다. 얼굴에 분은 덕지덕지 바르고, 빨간 입술과 검은 메니큐어를 칠한 기다란 손가락으로 블랙커피를 들며 먼 왕년을 응시하곤 합니다.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자랑, 군대에서의 용감무쌍했던 일에 대한 자랑, 지금까지 사귄 여자의 수에 대한 자랑, 아파트 평수에 대한 자랑, 자식 놈 서울대 간 것에 대한 자랑, 남편이 사다 준 다이아몬드 캐럿 수에 대한 자랑 등등 남녀 할 것 없이 자본주의적 최첨단 인간들은 왕년으로 먹고 왕년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해서도 너무 멀리해서도 안 되는 것이 왕년입니다. 왕년의 화려한 옷을 자랑하다 보면 오늘의 남루는 너무 초라합니다. 그렇다고 왕년의 초라함을 외면해버리면 오늘의 화려함도 사상누각일 수 있습니다. 왕년의 일은 잘됐거나 못됐거나 오늘의 거울로 삼으면 됩니다. 왕년에 잘 됐던 것이 오늘 그렇지 못하다면 이제 그동안 미처 챙기지 못했던 자기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왕년에 못됐던 것이 오늘은 화려함을 입었다면 그동안 자기를 도와주었던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 합니다.      
  이 무더위 지나 얼마 안 있으면 토방 섬돌 밑에 귀뚜라미가 울겠지요. 관방제림 숲그늘에라도 가서 무더위를 이기며 가을의 수확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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