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30)

편지 두 통

그토록 심하던 무더위도 처서 지나며 한결 수그러졌습니다. 조석으로 풀벌레들이 울고, 길가엔 코스모스들이 한두 송이씩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때 그리운 사람에게 문득 편지라도 한 장 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편지에 관한 시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김남조 시인의 「편지」라는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1950년 연합신문으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대표작으로 『사랑은 고백할 때조차 비밀로 남는다』『영혼과 가슴』 등이 있습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고 노래한 시인은 고은이었습니다. 풍성했던 여름이 가고 결실과 조락의 양면성을 지닌 가을이 되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지요. 한 해 결실이 변변치 않아서 외롭고,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며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게 되니 더욱 외로울 밖에요. 그래서 그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고, 그러면 그 사람은 ‘나의 그대’가 되어 그 편지를 받아줄 것이라는 꿈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꿈꾸는 사랑이라는 것 또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김남조 시인은 오늘의 시에서 말하고 있네요. 지금껏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대가 또한 꼭 그만큼 나를 외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겠지요. 어떤 대중가수의 노랫말처럼 사랑이 나를 울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 2연을 보면 그대를,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합니다. 더더욱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대’는 세속적 사랑이 아니라 시인이 신앙하는 신일 수밖에 없군요. 내 안을 비추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이 사람 가운데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대만 생각하면 눈물이 글썽거려지고 또 그대는 새로운 “나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그가 나를 가장 외롭게 하다니요? 아마도 이것은 그대만을 신앙하다보니 세속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기해야 하는 시인의 인간적 외로움을 애기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세속적 외로움을 뛰어넘어 나는 역시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씁니다. 아마 매일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신은 이미 내 기도를 듣게 계시니, 그 분에게 굳이 쓴 편지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이지만 사랑의 상실에 대해 노래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를 통해 사랑의 상실과 이에 대한 대응의 노래를 살펴보지요. 황동규 시인은 1938년 서울에서 나셔서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뒤, 많은 시집을 내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십니다. 시집으로 『꽃의 고요』『풍장』 등 많은 작품집이 있습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이 시를 읊어보십시오. 그러면 참으로 가슴을 촉촉이 저미며 다가올 이 「즐거운 편지」는 박신양 주연의 『편지』」라는 영화에 삽입되어 더욱 유명해진 시입니다. 하지만 황동규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습작시와 잃어버린 시를 빼고 지금 온전히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유성(流星)과 함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이 시는 고등학교 중반에 씌어져서 졸업 무렵 받은 교지에 실렸던 작품이라고 하지요.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황동규 시인의 시적 재능의 놀라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시에 담긴 정서와 사유의 의젓함 때문입니다.

이 사랑노래는 우선은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에서처럼 애인은 떠나가고 화자는 뒤에 남아 가는 사람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상황이 제시됩니다. 설령 그대가 떠나갈지라도 나는 그대를 생각할 것인데, 그것은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할 일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바람 부는 일이 어찌 사소한 일인가요. 이는 우주적인 일이 아닌가요. 이런 거대한 자연현상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화자의 아이러니는, 애인 이외의 것은 모두 사소한 것으로 보려는 사랑하는 자의 심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그대를 부르겠다는 마음 자세는 참으로 갸륵한 마음입니다. 죽자 살자 하고 좋아하다가도 조그만 어려운 일에도 쉽사리 변심해버리는 오늘의 사랑의 세태를 보면 역시 이런 마음은 전통적이자 여성적인 자세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화자는 다시 다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나의 사랑을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비록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해 그대가 날 찾아오지 못할지라도 화자는 더 이상 그대에게 연연해하지 않을 태세입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의 침묵」)의 기다림과는 전혀 다른 단언을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고 말입니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자연의 섭리라는 맥락에선 하나의 이별이라는 것도 회자정리(會者定離)처럼 무슨 대수롭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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