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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28)문순태 작가

<네번째 꿈, 내 사랑 자미화> 제28화

 양산보는 해가 설핏해서야 아이들을 재촉하여 처가를 나섰다. 방에 있다가 밖에 나오니 눈이 펑펑 쏟아졌다. 마당과 지붕에는 어느새 한여름 목화밭처럼 눈이 수북이 쌓였다. 폭설을 본 장모가 두 외손자들이 걱정되었는지 하룻밤 자고가라고 붙잡았지만 양산보가 먼저 인사를 올리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두 아이들은 눈이 오는 것을 보고 깔깔대고 좋아하며 저만큼 앞서 뛰어갔다. 눈발은 더욱 굵어졌고 어슬어슬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쌓인 눈 때문에 발이 숭숭 빠졌다. 증암천 노둣돌에도 눈이 한 뼘 이상 쌓여 조심해서 건너야만했다. 양산보는 두 아이들이 걱정되어, 한 아이씩 업어서 노두를 건넜다.

“노둣돌이 미끄러우니 내 등에 업히시오.”
양산보는 두 아이들을 건네 준 다음 아내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으며 등을 내밀었다.
“아이들 보는데, 망칙해라. 조심해서 건널 테니 냅둬요.”
아내는 기겁을 하며 남편 등에 업히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녀 남편 앞서서 천천히 노둣돌을 건너기 시작했다. 양신보는 마음을 졸이며 아내 뒤를 바짝 따랐다. 증암천 건너 쪽에서 두 아이들이 어머니를 외쳐 부르며 빨리 건너오라고 소리쳤다. 김 씨 부인은 아이들의 성화에 성큼성큼 노둣돌을 건넜다.

그런데 마지막 노둣돌을 건너다 말고 발이 미끄러지면서 물에 빠지고 말았다. 뒤따르던 양산보가 물로 뛰어들어 아내를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눈 위에 깔고 아내를 앉혔다. 김 씨 부인은 다행히 두 발만 흠뻑 물에 젖었을 뿐이었다. 양산보는 다급하게 버선을 벗기고 나서 두루마기 자락으로 두 발의 물기를 닦았다. 부끄럼 많은 부인은 한사코 몸을 웅크리며 다리를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양산보는 물기를 다 닦아낸 다음 곱은 손으로 아내의 발을 계속 문질렀다. 물에 젖은 자신의 발은 상관하지 않았다. 양산보는 아이들한테 남바위를 벗어달라고 하여 아내의 발에 씌우고 벗겨지지 않도록 조여 묶었다. 그는 물에 젖은 자신의 발은 개의치 않고 한사코 싫다는 아내를 등에 업었다. 어느덧 주위가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를 업은 양산보는 서둘러 눈 쌓인 둔덕을 올라 창암촌으로 향했다. 두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업은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말없이 아버지 뒤를 따랐다.

집에 당도하자 이번에는 부인이 남편의 젖은 버선을 벗기고 발에 물기를 닦고 주물러주었다. 두 아이들은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그들 눈에,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젖은 발의 물기를 닦아주고 주물러주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날 밤 양산보는 사랑으로 나가지 않고 부인과 같이 있었다. 그는 호롱불 아래서 부인과 마주 앉아 국화주를 마시며 국화꽃 목걸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 씨 부인은 부끄러운지 귀밑 볼이 붉어졌다. 열다섯 살에 시집와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도 아직 남편 앞에서 고개를 쳐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날 밤 부부는 아이들이 잠든 후 늦게까지 마주 앉아 그들이 만나서 살아온 이야기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 해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쌓인 눈이 무릎까지 빠져 집에서 지넷등까지 오르기도 힘겨웠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은빛으로 빛났다. 마을 뒤 등성이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무등산은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와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갈매빛으로 출렁이며 멀게만 보였던 무등산이 눈이 쌓이자 한껏 가까워진 것 같았다. 양산보는 어렸을 때 무등산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자주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곤 했었다. 이상하게도 뒷산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무등산은 더욱 높아져보였다. 지금, 순백색의 세상은 높고 낮음이 없어 보여 마음이 평화로웠다. 늘 푸른 소나무 숲도 갈색 언덕과 빈 들판도 온통 은빛이었다. 세상이 순백색이 되자 하늘이 현의 빛깔이 되어 아득히 높아보였다. 오랜만에 눈이 멎으면서 햇살이 쏟아져 내리면자 은빛이 더욱 빛났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 것 같았다. 이따금 바람이 거칠게 불어올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설화가 불불 흩날렸다.     

겨울동안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배 짜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양산보는 겨우내 사랑방에 들어앉아 책을 읽었다. 그는 정암 스승의 유배 길을 배종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올 때, 그 경황 속에서도 소학과 중용만은 잊지 않고 챙겨왔다. 특히 중용은 어렵게 인출(印出)한 것이라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양에서 창암촌으로 내려 온 후 스승의 가르침대로 소학과 주역을 하루도 멀리 하지 않았다.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뜻을 찾아내려고 했다.
 양산보는 주역이 미래를 예측하고 개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보는 점서가 아니라, 인생의 지혜가 담긴 유교경전이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서삼경 중에서 주역을 최고의 경전으로 믿었다. 특히 주역은 사람의 출생과 사망 기간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사후의 세계는 논하지 않았으며, 사는 동안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살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양산보는 64괘(卦) 풀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6괘로 난세의 처세를, 4괘로 치세의 처세를 풀이했다. 건괘는 어려운 때일수록 마음을 닦는다. 비괘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명이괘는 총명함을 감추는 것도 지혜다. 규괘는 미운 사람일지라도 만나야한다. 곤괘는 뜻을 굳게 지키되 편협하지 않으면 형통한다. 돈괘는 그대가 강호이거늘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겠는가.

이 여섯 가지 괘는 난세에 어떻게 처세를 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말해주는 것으로, 세상과 발을 끊고 고향에 묻혀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돈괘는 은둔을 말하는 것으로, 그대가 강호이거늘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겠는가는 대목이 그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네 가지 괘로 설명하는 치세의 처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이괘는 자신에게서 세상으로 향하는 배움. 진괘는 나아가야할 때는 나아가라. 정괘는 뒤집어엎어졌으면 바로 세워라. 비괘는 함께 하면 길하다. 양산보가 생각할 때 그의 생애 언제쯤 태평치세를 맞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진괘에서 성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나아가야할 때는 나아가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사는 동안 과연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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