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ㆍ특집 특집
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6) : 우송 국채웅

담양 최고의 대지주, 호남의 거부 ‘又松 국채웅’
당시 논밭 8,500마지기 포함 담양땅 200만평 소유
우송당 짓고 박동실 명창 등 국악인 적극 후원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중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I'/‘담양의 인물(6) 우송 국채웅’을 게재합니다.
‘담양의 인물(6) 우송 국채웅’ 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담양의 만석꾼 대지주, 호남의 거부로 명망을 날렸던 우송 국채웅 선생의 인생여정과 그가 일궈낸 부(富)의 원동력, 그리고 검소하고 부지런한 인성과 지역봉사 및 사회공헌 활동 등 전반적인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비록 일본인들이 담양땅을 많이 강탈하고 식량을 수탈하면서 농민들을 억압했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담양에는 조상에게 물려받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 재산을 모으고 지켜냈던 대지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드러나지 않게 민족을 사랑하고 애국활동에 도움을 준 이들도 있다.

당대 담양의 대지주 만석꾼들은 비록 재산도 많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대단했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과욕을 부려 소작농들을 착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돕고 교육에 투자하거나 독립자금을 내놓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 어르신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일제강점기 담양 최고의 대지주, 호남의 거부였던 국 참봉, 바로 우송(又松) 국채웅(鞠採雄) 선생이다.
당시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과연 얼마나 많은 토지와 부(富)를 소유한 거부였을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국 참봉 땅을 밟지 않고는 담양을 출입할 수 없고 국 참봉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그의 재산과 사람 됨됨이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자수성가, 호남의 거부로 성장한 우송 국채웅
담양의 대지주, 명망가로 오늘날까지 존경과 추앙 받아

우송 국채웅은 고려 충신 국유의 19대손으로 고종 8년(1871년) 담양부 서변면 천변리 국완열 씨와 영월 신씨 사이 3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고 몇 년후인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78세로 천수를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어린시절과 성장과정은 기록상으로 상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가 한창 명성을 날리던 대한제국말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우송은 국 참봉 또는 만석꾼으로 불렸고 지역내 가장 부(富)를 많이 가진 대지주요 명망가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과 어르신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렇다 할 유산없이 상업에 종사한 수십년간의 활동을 통해 전답을 사들여 담양의 대지주에 이름을 올리고 그 부(富)를 통해 당시 돈이 되는 다양한 사업에 재투자 하면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우송 국채웅은 일찍이 상업과 농업 경영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전남 지역에서 논밭 등 토지를 5백정보 이상 소유하고 있었던 조선인 대지주는 9명으로 파악되는데 담양의 국채웅을 비롯 순천의 김종익, 광주의 현준호, 강진의 김충식, 해남의 이환용·윤정현, 목포의 문재철, 화순의 오자섭·오병남 등이다. 이들중 담양의 국채웅은 농업 외에도 상업과 금융 등 다른 여러분야에서 경영을 꾀하면서 부를 축적해 온 것이 다른 지주들과는 다른 점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당시 국채웅은 각 지방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업에 종사했고 멀리 경기도 개성까지 오고가며 인삼 무역상 활동을 통해 돈을 벌었고, 번 돈으로 해마다 전답을 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채웅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적은 토지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사와 상업활동 등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토지 구입에 계속 투자해 대지주로 성장했으며, 이후 축적된 부(富)를 통해 대규모 농장과 농업경영, 창업과 투자, 그리고 금융에까지 사업을 확대시키면서 자본을 크게 늘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통해 국채웅은 지역사회 권세가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그는 결코 혼자만이 그 부와 풍요를 누리지 않고 당대의 국악인, 문화예술인을 우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지역의 가난한 민초들에게까지 아낌없이 베풀어 공덕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국채웅은 당시 다양한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통해 전답을 사들여 담양의 대지주로, 호남의 거부로 성장했다.

호남의 거부 국채웅의 경제활동
당시 백화점 격 ‘담양상회’ 창업
480억 투자 ‘우송농장’ 경영 나서
지역내 조선인 상권 확대에 크게 기여

변변하게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오로지 젊은 열정으로 장사를 통해 돈을 번 국채웅은 1922년 담양산업조합 창설에 이어 지금의 백화점 격인 ‘담양상회’를 창업, 당시 일본인 상점들로 주류를 이루던 담양의 상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조선인 상권확대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27년에는 전남산업조합 부조합장 직함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인 자본주로써 조합운영의 핵심을 담당했다. 또 국채웅은 담양의 산업발전을 위해 전기회사를 담양으로 유치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925년 9월, 그는 순수 조선인 자본으로 전등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했으며, 3만원을 자본금으로 투자했다. 당시 전등회사의 설립자본금은 총 12만원 이었음을 볼 때 국채웅은 이 회사 자본금의 25%을 소유한 대주주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1930년 이후 3-4년간에 걸쳐 농업회사 설립을 서둘러 마침내 1935년에 자신이 소유한 농지를 기반으로 자본금 120만원을 투자한 ‘우송농장(又松農場)’을 창설하고 농업경영에 나섰다. 당시 1엔(=1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40,000원에 해당되니 우송농장에 지금의 돈으로 약480억원을 투자한 셈이다.
우송농장은 농업만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미곡유통과 정미업, 창고관리업, 운송업, 금전대부업, 동산 및 부동산 매매, 임대차 중개, 보험회사 대리점 등 제반 산업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했으므로 요즘으로 치면 그룹경영, 즉 호남지방 최대 대기업 규모라 할 수 있다.

당시 우송농장은 담양읍 천변리에 본사를 두고 대표이사는 국채웅 자신이 맡았으며 이사는 차남 국영현 씨와 3남 국기현 씨, 감사는 장남 국상현 씨와 4남 국계현 씨가 맡는 등 가족형 지주회사로 운영했다. 그 당시에 전남지방의 농업관계 회사는 모두 12개가 있었으나 국채웅이 설립한 우송농장은 일제하 전남지역 최대 지주였던 강진의 김충식이 자본금 200만원으로 설립한 ‘동은농장’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자본금을 투자한 농업회사였다.

이후 우송농장의 근간인 토지는 농지개혁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되면서 보상을 받게 됐으며 이 보상금은 국채웅의 장손 국승관 씨에게 지급됐다. 손자 국승관 씨는 보상금으로 담양읍 천변리 8천여평에 자본금 30만원으로 ‘고려공업사’를 창업, 제재소 및 목공산업 일체와 각종 가구를 제작하는 다목적 공장으로 운영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1951년에 폐업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우리 국악과 예술을 사랑한 국채웅
우송당(又松堂)은 명창 박동실 키워 내
호남 소리 양대산맥 서편제 탄생의 산실

우송정(국채웅이 1932년 양각리 사미정에 건립한 정자)

우송 국채웅은 남다른 예술인의 기풍과 함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보기드문 품성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국창(國唱)은 물론 서예, 동양화 등에 남다른 애착과 호기심을 가져 전국의 유명한 서예가,화가 등을 담양의 우송당(又松堂)에 초청, 명사들의 필적을 찬양하고 서예와 동양화를 사들여 보관하는 등 우리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보존하는데 애를 썼다.
뿐만아니라, 우송당에 우리의 소리(唱)를 가르치고 공연하는 강단과 무대를 만들어 전국에서 이름있는 소리꾼과 국악인을 초청해 상주시키면서 공연과 후진양성에 매진토록 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중인 여러명의 인간문화재와 명창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국채웅이 우송당에서 우리나라 창작판소리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박동실 등을 후원하고 최고의 명창으로 키워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어린 박동실을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자 명창으로 배출한 것은 우송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으며, 또한 당시 담양에 국채웅이 창건한 우송당이 없었다면 호남의 서편제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편, 구한말-일제강점기 당대 유명 국악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교류장소 이자 공연무대였던 우송당(정면5칸,측면3칸/1920년대 건축)은 10년전까지도 담양읍 담주리에 현존하고 있었으나 노후로 인한 원형 훼손이 심해 지난 2006년 4월 이전,복원사업으로 현재는 죽녹원 시가문화촌으로 옮겨져 보존중이다.

근대교육에 남다른 열정 사재(私財) 보태
농촌 중견부인양성소 및 담양유치원 설립

▲담양유치원 1회 졸업사진(우송 국채웅이 1932년 사재 1만엔을 들여 설립, 좌 상단 손자 국승관 원장, 우 상단 국채웅 설립자)

국채웅은 근대적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담양읍 신성마을 인근 지금의 담양여중학교 자리에 농촌 중견부인양성소 설립운영에 300두락의 전답을 내놓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농촌여성들의 의식주 생활, 가정교육, 육아교육, 예절교육 등을 가르쳤으며 각 시군에서 1명씩 선발된 여성들은 1년간의 교육기간 동안 숙식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1931년에는 자신의 회갑 기념으로 담양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에도 관심을 갖는 등 지역사회 교육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그는 구.담양군청 청사 부지를 희사했고 구.경찰서 청사 건축비 절반을 부담했으며 해방후에는 담양중학교 설립에 따른 부지의 절반을 기탄없이 희사하는 등 공공사업 증진과 지역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국채웅은 사회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담양청년회에 가입, 1921년에 경리부장을 맡아 본격적인 사회계몽 활동에 참여했으며 지역 불교계 우송사, 보광사 사찰도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송 국채웅 회갑연 전국이 ‘들썩’
7일 동안 손님 1만1천여명 대접
담양최초 미제 6인승 승용차 구입

우송 국채웅의 회갑연(남사당패 줄타기 공연), 국채웅이 구입한 담양최초의 자가용 미제 6인승

우송은 1931년에 회갑을 맞이했는데,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담양의 대지주, 호남의 거부, 재력가로 명성을 날린 국채웅은 회갑에 즈음해 담양 최초의 자가용 승용차를 구입하게 되는데, 바로 미국산 ‘마르케트’ 6인승 승용차 였다. 그는 이 미제 수입차를 사는데 당시 4,500엔을 지불한 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1억8천만원 짜리 고급차였다. 국채웅의 자가용 승용차를 한번 만이라도 보기 위해 날마다 그의 집 앞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해 9월3일로 회갑을 맞이한 국채웅은 그의 저택(담양읍 담주리 105번지)에서 거창한 회갑연을 가져 무려 7일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회갑연에는 남사당패의 줄타기,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의 명창공연, 씨름대회 등이 매일 4회에 걸쳐 7일동안 열렸으며 또한 서울의 유명한 음식점인 ‘명월관’에서 요리사 60명이 담양에 직접 내려와 회갑잔치가 벌어진 7일 동안 하루 세끼의 모든 요리를 전담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잔치음식을 먹고자 찾아온 사람들에게 모두 음식을 대접, 무려 1만1천여명의 손님을 맞았다고 하니 당시 국채웅의 부(富)와 배포가 가히 짐작할 만 하다.

한편 우송 국채웅 선생의 후손으로는 장손 국승관 씨 일가 외에 손자로 국승준 씨(전.담양군노인회장) 일가와 손자 국승학 씨(장남 국창근 전.국회의원) 일가 등이 있다./ 장광호 편집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광호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