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뉴스 기획연재Ⅴ(소설) 추월산 길라잡이(제32화)

담양뉴스는 『기획연재Ⅴ/소설』로 2020담양 송순문학상 수상작인 강성오 작가의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를 월2회 연재중입니다. 소설 ‘추월산 길라잡이’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지역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나 억울하게 처형됐던 김덕령 장군의 아내와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한 소설입니다. / 편집자 주.

<32화> 9. 1594년 2월

민경이의 신신당부가 아니라도 능주는 단지에 신경 썼다. 만약 단지가 깨진다면, 장군이나 민경이가 크게 나무랄지도 모르겠지만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두 분 인품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단지가 깨지면 꿀이 흐를 것이고, 냄새를 맡고 맹수들이 다가올지 모르니, 그게 더 걱정이었다. 게다가 봇짐 안에는 등잔과 아주까리기름이 담긴 사기병이 있었다. 석굴에서 눈을 붙일 때 입구에다 불을 밝힐 요량이었다. 산짐승의 접근을 막으려고 말이다. 능주는 중심을 잃고 휘청일 때마다 단지와 사기병이 깨질까 봐 추운 날씨에도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능주는 잡목 가지를 해쳐가며 조심스럽게 산길을 걸었다.

남산 능선에 올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고르며 능주는 담양을 내려다보았다. 담양은 새까만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등롱불의 움직임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도깨비불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래서일까. 남산에 도깨비가 우글거릴 것만 같았다. 귀를 기울여보니 산새며, 들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적막강산이었다. 밤이 깊어 잠들었거나, 맹수의 등장에 입을 닫았는지도 몰랐다. 능주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자정이 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등롱불이 움직였으니 자정은 아직 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능주는 봇짐을 풀어 주먹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요동산으로 향했다. 요동산, 봉황산, 아미산, 거등산, 덕산, 채기산 등을 거쳐 남원으로 갈 것이다.

요동산으로 가는 길은 쉬운 편이었다. 바위산이지만 산이 높지 않고 길이 익숙해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을 걸었다. 정상 언저리에 석굴이 있는데, 기거서 잠시 눈을 붙이고 갈 생각이었다. 올라갈수록 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음습한 기운도 느껴졌다. 온몸에 긴장감이 스쳤다. 다른 길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길이 하나뿐이었다. 잡목을 헤쳐가며, 바위틈을 지나더라도 돌아갈 생각이 아니면 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 자던 곳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는데 이런 기분이 왜 든단 말인가. 능주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려고 과거 기억을 더듬었다. 어인 일인지 아내가 떠올랐다. 지금껏 기억에서 지우려고 몸부림쳤는데, 하필이면 아내가 떠오른 것이다.

아내와 결혼한 해의 늦은 봄이었다. 만발하던 때죽꽃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때죽꽃이 질 무렵에 따는 석청이 최고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능주 나이 서른둘이고, 아내 끝순이는 열여덟이었다. 끝순이는 임신 3개월에 접어들었으나 임신인지 아닌지 확실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약간 불룩할 뿐이었다. 석청을 따러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함께 가자고 따라나섰다. 산에 오르면 하루나 이틀은 산에서 자고 오기 일쑤였다. 산까지 오가는 시간과 높은 산에 오르는 시간, 석청을 찾아다니는 시간을 감안하면 산에서 자는 게 유리했다. 산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어떤 위험을 만날지 몰라 능주는 아내를 말렸다. 하지만 아내가 주먹밥을 챙겨 기어이 따라나서고 말았다.

지리산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아내가 따라나서는 바람에 능주는 가까운 추월산으로 향했다. 꼭 꿀을 따기보다, 능주가 어떻게 산에서 밤을 지새우는지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안전한 곳에서 잔다는 것을 알면 아내가 걱정을 덜 것 같아서였다. 능주는 연애하는 기분으로 산에 올랐다. 석청을 찾아 암벽을 뒤지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아내와 산새를 감상했다. 석청은 다음날 따도 충분했다. 추월산에 석청이 있는 장소는 두 곳이었다. 한 곳은 안전한 바위에 있고, 한 곳은 수직에 가까운 직벽 사이에 있었다. 직벽에 있는 것은 혼자서는 따기 어려웠다. 반면 다른 곳은 혼자 따기에 수월했지만,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라 능주는 아끼고 아꼈다. 아주 긴요할 때 따기 위해서였다. 내일이면 능주는 그 안전한 곳에서 석청을 딸 생각이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새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멋진 풍광에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능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해가 넘어가자, 둥싯 떠오른 달을 보고 아내는 또 감탄했다. 높은 산에서 보니 다른 느낌이라고 했다. 이슥한 밤이 되자 능주가 석굴에 등잔불을 밝혀놓고 나와 아내를 안내했다. 석굴에 들어가기 전에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높은 바위틈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도 신이한데 물까지 나오다니. 아내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장소에 들어온 듯 감탄사를 연신 토했다. 둘은 늦게까지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꿀처럼 달달한 시간이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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