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꿈, 내 사랑 자미화> 30화

자미화가 시들 무렵 창암동 언덕에는 다시 목화가 한창 피어났다. 양산보는 여전히 대봉대원림에 있었다. 그는 일꾼 몇 사람을 데리고 지난여름 큰비에 개울로 떠내려 온 돌을 치우느라 바빴다. 허물어진 둔덕도 돌로 메우고 흙을 채웠다. 조금 있으면 일손을 목화밭에 빼앗겨야했기에 원림을 가꾸는 일을 바짝 서둘렀다. 당초 그의 계획은 그해 가을부터 한 채 의 누각만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없는 그로서는 아버지 도움 없이는, 개울을 치우고 나무를 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양산보는 속만 태우다가 또 한해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아직 산에 눈이 녹지 않은 정월에 양산보의 넷째 아이가 태어났다. 부인의 말대로 딸이었다. 네 번째인데도 난산이었다.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아기는 제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박꽃처럼 희고 눈이 깊고 맑았다. 양산보는 봄이 되면 자미화를 심고 딸의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김 씨 부인은 해산을 하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산후 하혈에 좋다는 미역국에 쑥과 생강 말린 것을 다려 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양산보 어머니 말로는 하루에 한 번씩 개짐을 바꿔 찰 정도로 하혈이 심하다고 했다. 창평에서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해보더니, 백초상(百草霜)을 냉수에 타서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백초상은 소죽을 쑨 가마솥 밑에 엉긴 끄름을 말한다. 백 가지의 풀이 타서 검댕이가 서리처럼 맺혀 생긴 것이라는 의미다. 의원의 말대로 계속 백초상을 먹여보았지만 하혈은 멈추지 않았다. 한 달 이 넘게 산후병을 앓은 김 씨 부인은 날로 쇠약해져갔고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종당에는 먹는 대로 토하기까지 했다. 양산보는 걱정이 되어 여기저기 아는 사람한테 서찰을 보내 산후하혈을 잘 보는 의원을 수소문했다.
 
김 씨 부인은 양산보에게 성안마을에 사람을 보내 친정어머니를 좀 모셔와 달라고 부탁했다. 양산보는 즉각 찬모를 처가에 보내 장모를 모셔오도록 했다. 장모는 딸의 병세를 보더니 눈물부터 보였다. 장모는 양산보에게 당장 딸을 친정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양산보는 의술이 용한 의원을 알아보고 있으니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날 밤 양산보의 장모는 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부탁이 있어서 어머니를 오시도록 했구만요. 먼 일가붙이 중에서 나이 많도록 시집 못 간 처자나 초년과부가 있는지 한번 알아봐 주셔요.”
양산보 장모는 딸의 부탁에 의아심이 생겼다. “왜 그러느냐? 네 병수발 때문이라면 우리 집 끝순이 어멈을 보내마.”
“ 병수발 때문만은 아니구만요.”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냐? ”
“어머니, 암만해도 제 병이 나을 것 같지 않네요. 해서...작심을 했구만요. 첫째 둘째는 이만큼 컸으니 걱정이 없지만... 셋째와 갓난애는 아직....해서... 아이들을 믿고 맡길만한 여자가 있어야 겠어요. 저 죽고 나면 이 양반도 혼자 살게 하고 싶지는 않고...”
김 씨 부인은 훌쩍거리며 가까스로 말을 마쳤다. 그 때서야 어머니는 딸의 속내를 헤아렸고 딸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쳐 두 팔로 딸을 힘껏 안아주었다.
“네가 죽기는 왜 죽는다고 그려. 에미가 당장 집으로 데려가서 기필코 살려내고야 말테니 걱정 말그라.”
그 때서야 양산보 장모는 딸의 사주를 볼 때마다 단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아니어요 어머니, 제 병은 제가 더 잘 알아요. 당장 믿을만한 여자 한 사람 구해줘요. 우리 아이들 잘 키우고 저 양반 뒷바라지 해줄 사람 꼭 알아봐줘요.”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부탁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을 저미는 듯 서러움만 복받쳐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탁이어요. 수일 내에 꼭 찾아서 데려와 주세요.”
김 씨 부인이 손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매달리듯 말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학포 당숙으로부터 나주 송월촌에 산후병을 잘 다스리는 용한 의원이 있다는 서찰을 받았다. 이름이 유학자라는 의원은 두 다리를 못 쓰기 때문에 왕진은 어려우니 직접 병자를 데려가야 한다면서 서찰 안에 소개장까지 동봉해왔다. 양산보는 지체하지 않고 처가로 달려가서 가마를 부탁했다. 처가에서는 가마와 가마꾼 외에 나주까지 오가는 동안 병수발 해줄 젊은 처자까지 보내주면서, 나주에서 유숙할 수 있는 친척집을 소개해주었다. 김 씨 부인은 가마꾼들과 함께 온 처자를 반갑게 맞았다. 약조한 대로 친정어머니가 보낸 처자라 생각해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작달막한 키에 오동포동한 몸매를 가진 처자는 곱상도 밉상도 아닌 평범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성품이 음전해보인데다 몸이 튼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하룻밤 병수발을 드는 동안 김 씨 부인은 이것저것 에둘러 물어 처자의 출신과 성품을 알아보았다. 성씨는 유 씨, 이름이 버들이인 그녀 나이는 스물 하나로 시집을 못 갔으며 김 씨 부인의 친정어머니 외종 팔촌의 딸이라고 했다. 성산동에 살다가 아버지가 지병으로 죽자 작년 가을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성안으로 옮겨와 살고 있다고 했다.      
“나주꺼정 가고 싶지 않어요.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되남요.”
갑자기 김 씨 부인이 치료 받기 위해 나주에 가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무슨 소리요? 당숙께서 소개장까지 보내왔는데 가지 않겠다니.”
“죽는 날꺼정 집에 있고 싶어요.”        
“왜 갑자기 고집이오? 내가 기어코 부인의 병을 고쳐줄 터이니 나만 믿으시오.당장 내일 떠날 것이오.”
마음이 불안하고 다급해진 양산보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아내를 채근하여 가마에 태우고 길을 나섰다. 양산보와 병수발을 들어줄 처자도 동행했다. 양산보는 처가에서 보낸 버들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래를 따 먹다 들켜 죽을뻔 했던 버들이도 양산보를 알고 있어 한사코 눈길을 피했다. 그러나 양산보도 버들이도 굳이 아는 체 하지 않았다.   
“허면, 서방님은 그냥 집에 계셔요. 버들이가 있으니 지 걱정은 마시고요.”
 
김 씨 부인이 양산보에게 한사코 집에 있으라고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고 들기름 먹인 종이삿갓을 쓰고 앞장을 섰다. 그가 갓 대신에 종이삿갓을 쓰고 길을 나선 것은 번다한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니,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양산보는 한양에서 귀향한 후 참으로 오랜만에 출행을 하게 된 것이다. 8년만의 출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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