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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 담양의 역사인물(61) 조선의 충신, 청백리 조호(曺浩)

담양알기3/ 담양의 역사인물(61) 조선의 충신, 청백리 조호(曺浩)
호남의 진짜유학자 조수문의 장남 

조호(曺浩)는 창녕(昌寧)인으로 호는 운곡(雲谷)이며 죽림재 조수문(秀文)의 장남이다. 

천성이 영매하고 기질이 강직해 원대한 기품이 있었고 효심이 지극하여 효로 근본을 삼았다.

어려서부터 점필제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경서와 사서, 그리고 노·장·신·한(老·莊·申·韓)의 저서에 정통했다.

이조 성종11년(1480년)에 진사, 20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로 전임됐다. 함양군수 재임시 군정을 다스리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제처럼 하므로 향리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치적을 길이 숭앙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됐다.

자주 임금 앞에 나가 경서를 강론하고 보필의 직책을 완수하였는데 그 뒤 홍문관 교리로 근무하다가 수찬으로 전근되어 맡은 일에 정성을 다 했으나 임금을 간(諫)함이 과격해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제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사헌부 집의(執義)로 다시 승진됐으나 친환(親患) 때문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친상(親喪)을 당하자 애통해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고 초상범절을 정성을 다해 치루었다. 

3년 복상이 끝난 뒤 공주목사로 특명을 받았는데 그때 공주에는 큰 의옥사건(疑獄事件)이 있었으나 오래도록 판결을 내리지 못하므로 특별히 공을 공주목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부임 3일 만에 공판을 열어 원성 없이 판결하니 모든 사람들이 신과같이 밝은 처결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연산조(燕山朝) 3년에 다시 집의(執義)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문을 올려 국정을 시정토록 극간(極諫)하였다.

이로인해 모함을 받아 헤아릴 수 없는 화가 미치게 되므로 울분을 견디지 못해 끝내는 병이 되어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죽림재’에 분향됐다. 죽림재는 창녕조씨 문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림 조수문이 창건했다(출처: 담양삼강록)/ 담양뉴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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