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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천년 특별기획Ⅲ / 담양의 마을(3)-왕비를 배출한 마을 ‘향백동’

담양출신 왕비 배출한 마을 ‘향백동(香栢洞)’

조선왕조 2대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태생지
왕비 태어난 곳으로 정종이 ‘향기로울 향(香)’ 하사
마을 이름 ‘향백동(香栢洞)’ 으로 전해져 내려와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이번호에는 <담양의 마을탐방>  ‘담양읍 향백동’ 편을 게재합니다.
‘담양읍 향백동’ 편에서는 마을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마을의 자랑과 인물, 그리고 마을의 유래에 대해 들어보고 답사해 지면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왕비가 태어난 향기로운 마을 ‘향백동(香栢洞)’ 마을전경

▲왕이 하사한 마을이름 '향백동'(표지석)

▣ 향백동(香栢洞), 정안왕후 김씨 친정마을
   고려말 문하좌시중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
   마을뒷산 대나무숲에 집터 존재, 태생지 추정

담양읍 향백동(香栢洞) 마을은 조선왕조 2대왕 정종의 왕비였던 정안왕후 김씨가 태어난 곳이다. 그러나 정종비 정안왕후 김씨의 고향마을이 우리고장 담양 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 개국초기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과 정변 등 자칫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급변하는 정국에서 사려깊고 현명한 처신으로 부군인 정종(定宗)과 함께 천수를 누린 왕비 정안왕후 김씨....후대에 현모양처 왕비로 칭송을 받는 그녀가 바로 담양이 낳은 유일한 조선의 정비이다.

정안왕후 김씨는 고려말 문하좌시중(현,부총리)을 지낸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로 담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다.
정안왕후 김씨의 출생지는 현재의 담양읍 향백동 마을이며 당시 어떤 경위로 정종대왕과 혼인하게 됐는지 지금으로서는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왕조를 통틀어 담양출신 왕비는 정안왕후 김씨가 유일무이 하다. (*영조대왕 때 숙빈최씨도 담양출신 이지만 왕비에는 오르지 못함)
정안왕후가 태어난 향백동 마을은 본래 백동마을 이었으나 왕비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정종이 ‘향기로운 향(香)’을 하사함으로써 마을이름이 ‘香백동’ 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공덕비에도 향백동 마을이 왕비가 태어났던 마을이며 왕이 ‘향백동’ 이라는 마을이름을 하사했다고 새겨져 있다.

▲마을회관 앞 공덕비

▲정인왕후 태생지로 추정되는 마을뒷산 대나무숲

정안왕후 김씨의 태생지는 향백동 마을뒷산 대나무 숲 집터(백동리 46번지)로 추정된다.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 대나무 숲에 집터가 남아있는데 그곳이 바로 고려말 문하좌시중을 지낸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본가가 있었고 그의 딸 조선 2대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가 태어난 곳이라는 추정이다. 

이 마을 김광원 씨는 “정안왕후가 태어난 태생지로 추정되는 마을뒷산의 대나무숲은 서기원씨 댁 뒤편에 위치하며 과거 사람이 살던 가옥이 있었으나 빈집이 되면서 대나무숲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현재 대나무숲에 집터가 남아있으며 그곳 일대가 아마도 정안왕후의 태생지가 아닌가 싶다는 전언이다.

정안왕후의 태생지로 추정되는 이곳 대나무숲(약1300평) 소유자를 확인한 결과, 일제때 사법서사를 지낸 진학섭씨(오래전 담양읍장을 지냈던 진재성씨 부친)의 소유였으나 지금은 딸과 손자 공동명의로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조선 2대왕 정종, 그리고 왕비 ‘정안왕후’
   덕행과 우애, 현모양처로 후대까지 칭송
   권력을 버릴줄 알았던 지혜로운 왕비

조선 제2대왕 정종(재위 1398-1400년)이 동생 이방원(태종)의 권세에 눌려 애초에 왕이 될 생각이 없었듯 왕비 정안왕후도 마찬가지로 왕비를 꿈꾸지도 않았고 왕비가 될 생각도 없었던 인물로 역사에는 그려지고 있다.
당대의 실권자였던 시동생 이방원의 치밀한 집권계획에 따라 마지못해 정종이 조선의 제2대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자연 왕비가 되었을 뿐 그녀는 한사코 왕비 자리를 고사했던 사려깊은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종대왕 보다 7년 먼저 죽은 정안왕후 김씨는 공손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덕행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애로써 왕족의 형제자매와 친교를 두텁게 했다.
친정인 그녀의 집안도 명문가문으로 부친 월성부원군은 고려 공민왕때 문하좌시중을 지낼만큼 고위직에 올랐다. 정안왕후는 본래 아름답고 부드러운 성품에 검소하고 공손한 심성을 지녔고 바로 이러한 성품이 후일 정종이 천명을 누리는데 크게 기여한 내조였다고 전해진다.

정종 또한 성품이 순박,정직하고 단정하고 엄정했다. 정종은 정안왕후 보다 두 살 아래로 1357년(공민왕 6년) 함흥의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첫째부인 안빈 한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방과로 일찍이 관료로 진출했으며 1377년 20세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양광도에 침입한 왜구를 영주도 고산 아래에서 격파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자 정종은 영안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로써 병권에 관여했다.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이어 2대왕이 됐으나 애초 그는 이미 정권교체기 당시 실권자였던 동생 이방원의 집권계획에 따른 강권에 의해 억지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이러한 이방원의 의중을 알아차린 정종비 정안왕후는 남편인 정종에게 왕위에 오르는 것을 조심스럽게 반대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 자리는 우리 자리가 아니옵니다. 바람부는 방향은 이미 정해졌는데 돛단배가 어치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정종에게 말하자, 정종이 그녀를 달랬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방원의 뜻이 하늘이 뜻보다 강하니 난들 어쩌겠소”

그리하여 정종은 왕위에 오를 수 밖에 없었고 왕위에 앉아있던 2년 동안 정종과 정안왕후 부부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갈 궁리만 했다. 자칫 방원에게 권력욕이 있다는 징후만 보여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일이였기에 그들 부부는 하루하루 긴장속에서 방원의 눈치를 살피며 왕, 왕비 노릇을 해야했다. 그리함으로써 그들은 조선건국초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권력암투에서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의 제2대왕으로 등극했던 정종은 즉위 2년만인 1400년 11월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정안왕후 김씨의 간절한 바람이었고 그것이 곧 목숨을 부지하고 천수를 누리는 길이었다.
정안왕후가 여느 왕비나 후궁들처럼 심상치 않는 정국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렸더라면 정종과 동생 방원의 우애가 파탄날 것은 뻔한 이치였고 정종이 천수를 누리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권력 집착에 안달했던 당시의 소인배들에 비하면 정안왕후는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았던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비였다.

▣ 자녀 두지않고 천수 누려
   후궁 단속과 내명부 관리 탁월

정종과 정안왕후 사이에는 대를 이을 후사가 없었으나 정종은 정안왕후 외에 일곱 여인을 후궁으로 두어 이들 후궁들에게서 모두 15명의 자녀를 낳았다.
정안왕후 김씨에게 후사가 없음은 그녀가 스스로 회임을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후사를 두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후사를 둠으로써 방원의 경계와 눈밖에 날 수 있었을뿐 아니라 자칫 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녀를 두지 않으려 노력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어쨌든 7명의 후궁에게서 있을 수 있는 권력욕을 잘 단속했고 정종에게 후환이 미치지 않도록 처신한 정안왕후의 지혜와 덕망은 길이 후대에 전해진다. 더구나 일곱 후궁을 거느리며 풍파없이 살얼음판 정국에서 모두 다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내명부를 잘 다독거린 것도 커다란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2대왕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

정종과 정안왕후는 태종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으로 물러나 태종의 예우를 받으며 개성 백록산 기슭의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다가 정종은 선위후 20년째인 세종 원년 1419년 9월에 63세로 승하했다.
정안왕후는 1355년(공민왕 4년)에 태어나 1398년(태조7년)에 세자빈(빈궁)에 책봉됐으며 이어 왕비에 올랐다. 정종이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순덕왕태비가 됐다. 정종과 함께 개성 인덕궁에서 지내다가 1412년(태종 12년)에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호는 후릉으로 개성에 있으며 정종과 쌍분 형식으로 안장됐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나주 완사천 우물'

▣ 담양출신 왕비 정안왕후 태생지
   문화유적으로 복원, 관광자원화 필요

한편, 내년이면 고려 현종(1018년) 이래 담양의 지명을 사용한 지 1천년이 되는 ‘2018년 담양지명 천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이에 담양군을 비롯 여러 지역사회 각계각층 및 문화단체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 개국 초기 2대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가 태어난 곳이 바로 담양읍의 향백동 마을이고, 태생지로 추정되는 터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왕비의 집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함께 복원을 통해 이를 담양의 소중한 문화자원으로 보존하는 작업이 꼭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물론, 담양천년의 기념사업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모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여론이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나주 완사천 우물’을 복원해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가까운 사례가 있음을 볼 때, 조선 2대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의 출생과 태생지, 그리고 왕비로써의 인품과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장광호 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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