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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8) : 시인 송덕봉

조선시대 4대 여류 문인 ‘송덕봉’
16세기 조선의 최고 엘리트 여성 평가
‘미암 유희춘’의 아내 이자 학문적 동료
후대에 시문 모아 국역 ‘덕봉집’ 출간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중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I'/ 담양의 인물(8) ‘조선의 여류시인 송덕봉’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본지, 2018담양천년 ‘담양의 인물’로 재조명
최근 장산리 고향마을에 ‘덕봉 시비’ 조성

▲ 고향마을에 세워진 송덕봉의 ‘시비’

조선시대 보기드문 여인상 이자 현모양처로 명성을 얻은 ‘신사임당’ 같은 뛰어난 여류 시인이 담양에도 있었다.
바로 담양 대덕면 장산마을 출신으로 ‘미암일기’(보물 제260호)의 주인공 미암 유희춘의 아내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한평생을 함께 한 여류시인 송덕봉 이다.

송덕봉은 신사임당,허난설헌,황진이와 함께 조선 4대 여류문인 중 한명으로 거론된다.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훨씬 더 유교적 교육을 학습한 여성 엘리트이자 지성인 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송덕봉이 남긴 한시 25편과 글을 통해 드러나는 사대부가의 바람직한 여성상, 부부간의 애틋한 정, 가족애 등 그녀의 생각과 사상, 일상을 볼 때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와는 또다른 조선시대 여성의 일생 답지않은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덕봉의 고향마을 대덕 장산리에 시비 조성과 함께 학계와 미암 유희춘 일가, 송덕봉 문중에서도 조선 4대 여류문인으로 평가받는 담양출신 송덕봉에 대한 관심과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본지에서는 ‘2018담양천년 특별기획/ 담양의 인물’로 송덕봉을 소개하고 재조명함으로써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덕봉의 생애와 사상,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처신과 행보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 송덕봉은 어떤 사람?
홍주 송씨 송준의 3남2녀중 막내딸
외조부는 전라감사·예조판서 지낸 이인형

▲ 몇년전 발간된 ‘국역 덕봉집’

송덕봉(1521-1577)은 1521년(중종 16년) 홍주 송씨 송준(1477-1549)과 어머니 함안 이씨 사이에서 3남 2녀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휘는 ‘종개’, 자는 ‘성중’ 이며 호는 ‘덕봉’ 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휘,자,호를 갖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에도 송덕봉은 이 세가지 모두를 가진 보기드문 여성이다. 그녀의 호 덕봉은 현재 담양 대덕면 장산리 대곡 뒷산 봉우리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버지 송준은 1507년(중종 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사헌부 감찰, 단성 현감을 지냈다. 어머니 함안 이씨는 연산군때 대사간,승지,전라감사,예조판서를 지낸 이인형의 딸이다.
송덕봉은 1536년(중종 31년) 12월, 16살의 나이에 8살 위인 유희춘과 혼인하게 되는데, 유희춘의 자는 ‘인중’ 호는 ‘미암(眉巖)’ 으로 보물로 지정된 그 유명한 ‘미암일기’를 쓴 저자이다.

이 둘이 혼인할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암의 학식과 인품에 반한 덕봉은 그와 혼인하기로 작정했으나 미암의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반대하자. 미암에게 신부집에 신행 올 때 버선신발에 두꺼운 솜을 포개신고 오도록 했다고 하는데 오늘날로 치면 키높이 신발을 신고 장가 오도록 한 것이다.

또 어느날 미암이 여자로서 콧대가 센 덕봉을 빗대어 “부인이 문 밖에 나감에 코가 먼저 나가더라(婦人出戶鼻先出)” 고 놀리자, 덕봉은 “남편이 길을 다니매 갓 끈이 땅을 쓸더라(夫君行路櫻掃地)” 며 유난히 키가 적은 미암을 빗대어 맞받아쳤다. 이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미암과 덕봉은 함께 사는 동안 내내 시문을 주고받으며 평생을 친구처럼 벗처럼 지냈다.

# 미암과 덕봉의 고향마을 옛 본가 터(후손 유근영씨가 살고있다)

미암 유희춘은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균관 학유를 비롯 홍문관 수찬,무장 현감, 사간원 정언 등 관직을 지냈고, 1547년(명종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는 등 18년간을 유배생활을 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성균관 대사성, 홍문과 부제학,예조참판,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전라감사를 지냈다.

미암은 관직생활과 유배생활 동안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홀로 객지에서 살았으며 송덕봉은 고향집에서 시부모 공양과 가솔들을 관리하며 생활했다. 부부는 떨어져 지내는 20여년의 세월동안 시와 편지, 글로 마음을 전하고 정을 나누면서 한 평생을 동반자로, 학문적·사상적 동료로 살았다.

한편 미암 유희춘과 송덕봉이 살던 본가는 현재 대덕면 장산리에 있다. 옛 집은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 후손 유근영 씨가 미암과 덕봉의 사당을 지키며 살고 있다. 또 미암과 덕봉이 남긴 문집과 유물은 마을 입구에 조성한 ‘미암 유희춘 기념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미암과 덕봉의 사당

▣ 조선시대 보기드문 ‘당당한 여성상’
   시문 25편에 남편 미암의 처신 꾸짖기도
   송순, “덕봉은 재색 겸비한 재원” 평가

송덕봉은 어릴적부터 가학(家學)과 독학으로 글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외가가 고관을 지내고 아버지도 양반 관료인 만큼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며, 후에 남편 미암 유희춘의 행장(行狀)에도 기록돼 있듯이 ‘경서’ 와 ‘사서’를 두루 섭렵해 여성 선비로서의 풍모를 갖추었고 40여년의 결혼생활 동안 꾸준히 시문을 지어 ‘덕봉집’을 남겼다.
‘덕봉집’은 그녀의 조카 송진이 덕봉의 시문 38수를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현재는 전하지 않고 다만, ‘미암일기’와 부록에 편지 1통, 문 2편, 시 20 여수가 등이 전해지고 있다.

송덕봉은 남편 미암 유희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는 부부가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 편지를 통해 집안 소식을 전하고 서로의 애틋한 정도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송덕봉의 시는 대부분 화답시와 자연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답시는 남편 미암과 가족의 편지나 시에 화답해 지은 것들로 여러편이 있으며 대표적인 시를 소개하면,

“황금띠를 둘렀으나 선비로서는 극진한 영화,
돌아와 초당에 누워 건강을 돌봄이 어떠하오?
벼슬은 사양할 수 있다고 일찍이 약속했으니
뜨락에서 달을 보며 돌아오길 기다리오.“

이 시는 남편인 미암 유희춘이 가선대부에 제수됐을 때 지은 것이다. 전라감사를 지낸 미암이 또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어 덕봉에게 편지를 보냈는 바, 덕봉은 뜻밖에도 학문하는 선비로서 이미 극진한 영화를 누렸으니 그만 물러나서 건강을 돌보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낸 것이다.

이외에도 미암이 벼슬살이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근 4개월동안 홀로 자면서 일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편지를 담양의 덕봉에게 보낸 바, 덕봉은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이로운 일이지 결코 부인에게 자랑할 일이 못된다”고 책망하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덕봉은 시를 즐겨 썼을 뿐 아니라 재능도 좋아 심지어는 미암에게 “시를 짓는 법이 직설을 하여 문장을 쓰듯이 해서는 안된다” 며 시 짓는 법을 훈수하기도 했다. 이에 미암은 덕봉의 말에 따라 시를 짓는 등 부부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사회상으로는 보기드문 경우이다.

덕봉은 또 영릉 참봉 벼슬을 하는 아들이 모처럼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 덕봉에게 붉은 저고리 선물과 시 한수를 바치는 바,

“외로운 양이 석벽을 오르다가
눈을 핦으며 차가움을 견디네.
뼈가 드러나고 털도 비록 빠졌지만
봄이 오면 뜻이 절로 즐거우리“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바위틈을 오르는 한 마리 양에 빗대어 객지에서 벼슬하는 어려움을 호소하자, 덕봉은 아래와 같은 시로 화답하고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기쁜날이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위로했다.

“양이 석벽에 오름을 말하지 말라.
뜻이 있어 시리고 차가움을 견딘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올지니
봄바람을 버들과 함께 즐기리라.“

▲미암 유희춘 유물전시관(미암과 덕봉의 유물 다수 전시)

이렇듯 송덕봉이 남긴 25편의 시문에는 남편 미암 유희춘과 가족에게 주고받은 화답시, 편지, 글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남편이 주색에 관심이 없고 책을 가까이 한다는 시를 보내오자, 학문과 함께 술과 음악에도 진리가 있다고 조언하는 시를 지어 답하기도 하고, 고위 관료인 남편을 꾸짖는 글도 여럿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시문으로 볼 때, 송덕봉은 조선시대 일반적이었던 순종적인 삶을 살아간 여성상이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선 당당하고 진보적인 삶을 살아간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송덕봉의 이런한 모습은 현모양처의 전형을 보여준 신사임당과도 다르고, 허난설헌의 우울함과도 사뭇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유교의 윤리와 제한된 신분의 범위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기의 삶을 개척하려고 했던 여성 문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덕봉은 뛰어난 자질과 문학적 재능, 그리고 학문적 가풍과 남편 유희춘과의 문학적·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일생을 효부(孝婦),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살았으며, 비록 여성이었지만 전혀 위축됨이 없이 시대를 풍미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재능있는 여류시인 이자 문인으로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고향에 낙향해 면앙정을 짓고 당대 미암과 교류하던 송순은 덕봉의 처신과 시문을 두고 “가히 재색을 겸비했다”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 장광호 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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