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꿈, 광풍각을 짓다> 제54화

“하오나, 소문에는 선비님께서 진인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동나무를 심고 대봉대를 지었으며 악정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은행나무를, 휘일지언정 꺾일지 않을 만큼 절개와 지조가 강하다는 대나무를 심었는데, 이에 대한 세상의 눈과 소문을 두려워하여 임금에 대한 충절을 뜻하는 소나무를 심었다고도 합니다만.”

고운의 그 같은 말에 양산보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참고 허탈하게 웃었다. 어린 선비들에게 화를 냈다가는 오히려 오해를 사게 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봉황은 군자를 뜻하며 봉황이 대나무에 맺힌 이슬과 열매만 먹는다하여 대나무를 심었고 소나무는 사철 푸른 그 기상이 좋아서 심었을 뿐이네.”    

양산보는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고운이 약간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하며 같이 온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실망이라니? 자네들은 나한테 무엇을 기대하고 왔는가? ”
“저희들은 선비님한테서 정암 대감의 정신과 혼을 이어받기 위해서....”

유미석이 양산보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자네들은 지금 한창 학문연마에 매진할 때가 아닌가. 세상사에 대해 지나치게 유심하면 학업에 방해가 되네. 오직 과거공부에 매진하여 출사한 연후에 뜻을 펼치도록 하게.”

양산보는 좋은 말로 그들을 다독여주었다.

“허면 앞으로 자주 선비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는지요.”
“언제든지 환영하겠네.”

네 사람의 어린 선비들은 양산보에게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일어섰다. 그들은 원림을 한 바퀴 돌아보고 돌아갔다.

소년선비들이 돌아간 뒤 양산보는 그날 하루 내내 마음이 무거워 제월당 밖을 나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잠재웠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난 듯 사람들 대하기가 싫었다. 정암 스승이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심신이 오그라들었다. 쌍봉사 옆에 스승을 가매장하고 창암동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그는 처절한 그 광경을 잠시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 보았던 죽음의 장면은 너무 처참했다. 도학과 군자지도를 말하고 임금 앞에서 언제나 당당했던 스승이 한갓 미물이나 비풍참우(悲風慘雨)한 초개 같은 몰골로 죽어간, 참담하고 나약함에 세상에 대한 모든 꿈과 욕망이 두려움으로 변해버렸었다.

금부도사가 사약사발을 들고 소쇄원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가 집에 돌아와서 두문불출했던 것과 출사를 포기한 것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제 겨우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듯싶었는데, 소년선비들을 만나고 나자 다시 심신이 옭죄어든 기분이었다. 자신이 대봉대를 짓고 봉황이 깃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세상을 바꿀 진인을 기다린다고 하다니. 이런 소문이 조정에 들어간다면 뒷감당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당장 대봉대를 허물고 오동나무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양산보는 벽에 도배를 하여 감추어둔 정암 스승의 절명시를 꺼내어 문갑 바닥에 깔고 겹겹으로 책을 놓았다. 그래도 불안하여 그는 다시 벽지를 뜯고 도배를 하고 그 위에 절죽도를 걸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날 밤 양산보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 잠들지 못하고 한동안 뒤척였다. 소년선비들이 따지듯 묻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결코 불순한 마음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님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그들은 사흘 후, 열 명 남짓 되는 젊은 선비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15세 미만의 학동들을 데리고 양산보를 찾아왔다. 양산보는 그들을 보자 전각 안으로 들이기가 조금은 저어되어 잠시 망설였다.

“창평 근동에 사는 동문수학하는 친구들입니다. 선비님께 인사 올리고 싶어 해서 함께 왔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사흘 전에 찾아왔던 고운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나 양산보는 선뜻 계당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잠시 미적거리고 있었다.

“함께 온 벗들은 모두 선비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인사를 받으시지요.”

유미석이 다시 말해서야 양산보는 마지못해 마루로 올라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소년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우루루 양산보를 따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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