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꿈, 조광조의 죽음> 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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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 변두리인 남정리 한갓진 곳 배소에 도착한 다음날, 학포 당숙은 한양에서 같이 내려온 두 아들 응태와 응정을 데리고 능주에서 반나절 길도 안 되는 다라실 본가로 갔다. 다음날에는 제자 이두도 남평 집에 다녀오겠다고 떠났다. 허름한 초가삼간 집에는 조광조와 양산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능주에 도착한 날부터 매지구름이 사라지고 눈이 멎더니 이틀째 하늘이 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져 내렸다. 간단하게 아침을 때운 스승과 제자는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양산보는 처음으로 스승과 가까이 앉아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 가슴이 설렜다. 동문들과 함께 글공부를 할 때는 강을 바칠 때나 겨우 무릎을 꿇어 허리를 곧추 세우고 스승과 마주앉을 수 있었으나, 그 때는 너무 긴장되고 마음이 옭죄어 눈이 마주치는 것도 어렵게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배소이기는 해도 스승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서 앉아있을 수 있다니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보 너도 집에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
조광조가 고개를 들어 무연히 집 앞의 연주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서 네 집이 가깝다면서...”
“무등산 너머인데 무질러 가면 한나절 길도 못 됩니다.”
“내가 자유로운 몸으로 여기까지 왔더라면 네 집에 가서 춘부장도 뵙고 하룻밤 유하고 갈 수 있었으련만...참으로 안타깝구나. ”
“그런 날이 있으면 제 집안에 얼마나 큰 광영이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되어 아버님 창암공께서 네 학업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겠구나. 다른 스승을 소개해 줄 터이니 학업을 계속하도록 해라.”
“아닙니다요. 여기 있다가 스승님께서 풀려나실 때 모시고 한양으로 같이 가겠습니다요.”
“내가 언제 풀려날 줄 알고....”
“상감께서 결코 스승님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글쎄다.”
“꼭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요.”
“지난번 현량과에 네가 선발되었어야 했는데...”
“선발이 되었더라도 출사를 포기하고 스승님을 모시고 왔을 것입니다.”
그것은 양산보의 진심이었다. 스승이 유배를 떠난 상황에서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스승이 언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될지는 모르나, 해배가 되는 그날까지 스승을 수발하고 지내다가 모시고 함께 한양으로 다시 올라갈 결심이었다. 그래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렇게 스승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것은 하늘이 주신 소중한 기회라고 여겼다.
“여기서 금산이 이틀거리 쯤 된다지?”
조광조가 앞산에 눈길을 머문 채 깊은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금산으로 유배를 당한 김정을 생각해서 묻는 말이다. 조광조가 유배 길에 오를 때 그와 가까운 관원들도 모두 적소로 떠났다. 김정은 금산, 김식은 선산, 김구는 개형, 윤자임은 온양, 기준은 아산, 박훈은 성주, 박세희는 상주로 각각 유배를 당했다.
“머지않아서 모두 다시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강녕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왕도정치를 꼭 실현시켜야하지 않겠습니까? ”
“아암, 그래야지.”
“기필코 그런 날이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 상감께서는....상감께서는....”
조광조는 말끝을 흐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중종의 나약한 성심과 우유부단함을 걱정하고 있었다.
학포는 다음날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능주로 돌아왔다. 그는 하인과 함께 이불이며 먹을 것, 조광조가 특별히 부탁한 서책까지 챙겨 잔뜩 가져왔다. 다음날에는 남평에 갔던 이두도 먹을 것을 듬뿍 싸가지고 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광조는 학포에게 절죽도 한 점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학포의 대 그림은 모든 선비들이 갖고 싶어했다. 학포는 주저하지 않고 집에서 준비해 온 지필묵을 꺼내 조광조가 보는 앞에서 절죽도를 그렸다. 반절 크기의 그림으로 대나무 잎이 화면에 가득찼다. 문기 가득한 묵죽의 댓잎파리에서 소소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학포의 절죽도를 보니 혜능선사의 깨달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 같구만.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사시사철 푸름과 올곧음을 잃지 않으니 이는 선비의 기개와 같지 않은가.”
조광조는 그렇게 말하고 오랫동안 학포의 절죽도를 들여다보았다. 조광조는 양산보에게 절죽도를 임금이 계시는 북쪽 벽에 붙여 놓도록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동지를 넘기자 눈발이 비치고 바람마저 드세어지기 시작했다. 이날 학포와 이두가 잠시 밖에 나가고 정암과 양산보만 남게 되었다. 바람이 조금 숨을 죽이는가 싶더니 눈발이 굵어졌다. 눈이 내리자 정암이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앉았다. 그는 오랫동안 앉아서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승님, 고뿔드실가 걱정입니다.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괜찮다. 남쪽지방 눈이 더 희고 탐스러운 것 같지 않으냐? 눈송이가 꼭 꽃 같구나.”
“눈을 닮은 꽃이 있기는 합니다요.”
“그래? 무슨 꽃이냐.”
“입하 때 핀다고 하여 입하꽃이라고 하는 꽃이 멀리서 보면 꼭 눈송이 같습니다. 쌀밥꽃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아직 입하꽃을 보지 못했다. 내년 입하가 되면 그 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전에 해배가 되어 올라가셔야지요.”
“글세다. 입하꽃을 보자면 그 때까지 여기 머물러 있어도 괜찮겠다만.”
“아닙니다요.”
정암은 한동안 말없이 무연히 눈 내리는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양산보도 입을 열지 않고 시선을 하늘 끝 멀리 고향을 향해 던졌다. 마당에는 어느새 눈이 우북하게 쌓였다.
“산보야.”
“예, 스승님.”
“너는 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양산보는 스승이 무슨 뜻으로 묻고 있는지를 헤아릴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정결하게 쌓인 저 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다.”
“아, 예. 저는 발자국을 생각합니다요. ”
“사람 발자국 말이냐? ”
“ 예. 순백의 눈밭 위에 발자국을 찍을 때 묘한 기분이 듭니다요. 그리고 누가 그 발자국을 딛고 따라올지 궁금하기도 하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싶으냐? ”
“스승님을 닮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안 된다. 나는 잘 못 걸어왔느니라. 너는 내 발자국 흉내를 내지 말고 네 이름 석자로 네 발자국을 만들거라.”
정암은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학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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