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패션이 사양기에 접어들어 업종을 전환해야 했습니다.”

권인수씨는 서울에서 의류를 생산하는 공장을 경영했다. 토탈패션을 30년 운영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소시민에게 늘 그렇듯 생활은 여유가 있었지만 사생활이 없었다. 아내와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려고 날밤을 새우며 작업하는 일이 허다했고, 일요일에도 공장을 가동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여행보다 부족한 잠을 자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도 시간이 나면 지인들과 어울렸다. 그는 베푸는 것을 좋아해 지인들에게 술이며 밥값을 하나도 부담시키지 않았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토탈패션이 사양산업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양산업이라기보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질 좋은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다 보니 종소기업의 일거리가 점점 줄어든 거지요. 업종을 전환해야 했습니다.”

토탈패션을 정리하고 중장비 사업을 염두에 두고 굴삭기 자격증을 땄다. 굴삭기를 사서 새만금 간척 사업에 투입했다. 초기에는 일도 많고 장비도 비싸 풀가동했다. 기사를 구해 주야를 돌렸다. 사람은 기계처럼 풀로 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조사가 있으면 쉴 수밖에 없었다.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쉬면 대체인력을 넣어야 했다. 주인의식과 사명감이 없는 대체 기사들은 기계를 함부로 다루었다. 정규기사가 돌아오면 기계에 문제가 있다고 수리를 요청했다. 수리비가 만만치 않았다. 기껏 번 돈을 수리비로 꼬라박고, 기사 월급 주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게다가 굴삭기를 다루는 실력도 다른 사람보다 딸렸다. 또 다른 업종을 찾았다.

“아무리 질 좋은 상품도 팔리지 않으면 무용지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판로가 이미 구축된 담양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건 귀농이었다. 귀농을 염두에 두고 작목을 검토했다. 향후 십년 정도는 해야 할 일이라 신중을 기했다. 십년 이상 살아야 하는 자리. 어쩌면 여생을 모두 보내야 할 장소. 허투루 결정하기 싫어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고 해서 먹고 사는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않았다. 소득과 환경, 여유, 재미있게 지을 수 있는 작목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고민 끝에 딸기로 결정하고 지역을 알아보러 전국을 돌았다. 대전, 논산, 밀양, 정읍 등 딸기로 익히 알려진 지역을 돌며 정보를 파악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담양으로. 담양은 판로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질 좋은 옷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으면 무용지물 아니겠습니까?”

재고는, 어떻게라도 처분해야 할 근심거리에 불과했다. 딸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밤잠을 줄이고 생산했는데 판로 확보가 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그런데 담양은 판로 문제만큼은 전국 어느 곳보다 앞섰다. 생산만 하면 어떻게든 팔 수 있는 곳이 담양이었다.

▲작업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부부

▲최상급 사랑의 보석 생산을 위해 꼼꼼히

아내에게 담양으로 귀농하자고 했다.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환영도 하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비교적 쉽게 동의를 해준 것이었다. 땅을 알아보려고 담양 관내를 돌았는데 마침 매물이 나와 있었다. 토경으로 딸기를 재배하고 있는 농장이었다. 그는 다음날 바로 계약했다. 조건도 따지지 않았다. 그에게 맞는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계약과 동시에 잔금을 치르고 다음 날부터 딸기를 수확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아닌 기존 농가의 이름으로 서울로 출하했다.

그런데 상품이 거의 최하 등급이었다. 아마도 상품이 좋았으면 땅을 내놓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살려보겠노라고 적극성을 띄었다. 부랴부랴 작목반에 가입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멘토를 연결해달라고 요청했다. 센터에서는 가까운 곳에 계신 멘토를 연결해주었다. 딸기에 문외한인 그는 멘토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빨리 배우려는 욕심에 다른 농가를 찾아 자문도 구했다. 많은 사람이 자문해주었다. 그는 자문대로 딸기를 키웠다.
“그게 문제였어요. 이 농가 저 농가 이야기를 듣고 영양을 공급하다보니 넘쳤습니다. 10이면 충분한 곳에 50을 더 투자하게 된 것이죠. 부족하면 딸기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데, 넘치다보니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 일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는,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도 그는 수업료를 내지 않고 그만큼 배웠다는 생각했다. 든든한 멘토까지 생겼으니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아보았음에도 예상을 빗나간 경우가 있었다. 딸기만 재배하면 육개월은 쉴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쉬는기간에 취미생활이나 개인적인일 등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삼개월이 농한기였다.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삼개월을 효율적으로 보내려고 아내와 전국일주를 했다. 무엇보다 큰 보람이었다.

▲육묘장에서 작업중

딸기는 먹거리이자 생계 수단이지만, 그에게는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그를 찾아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었다. 귀농생활은 부부가 붙어서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 보니 부부사이도 자연스럽게 나아졌다. 때문에 딸기를 재배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이 있고, 보살필 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 마음으로 비닐하우스를 살폈다. 세동을 두번 이상 도는데 약 1.5킬로미터 이상을 걷지만 운동이라 생각하니 즐겁기 그지없었다. 기술센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받는 교육도 새로운 재미였다.

“딸기는 사랑의 보석.”

“딸기를 반으로 갈라보세요. 하트모양에 가깝습니다. 불그스름한 하트.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그래서 저는 딸기를 사랑의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딸기를 이렇게 예찬했다. 예찬만으로 끝나지 않을 각오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딸기를 재배할 생각이다. 딸기로 다양한 먹거리를 만들어보고도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런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땅을 임대하지 않았다.

“땅을 임대하면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뜻이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땅을 임대한 순간 언젠가는 떠날 준비를 잠재적으로 하는거지요. 그래서 임대기간이 끝날 때의 갈등을 애당초 없애려고 땅을 임대해서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땅을 사서 귀농을 시작한건 아무리 따져봐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딸기를 먹어본 사람들이 맛있다고 했을 때, 자부심을 느꼈다. 방문한 지인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가 재배한 딸기를 포장해서 건넬 때, 상대가 먹든 안 먹든,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술과 식사 대접이 전부였던 지난날보다 즐거움이 배가된 것이었다.

▲수정용 벌통

누구에게라도 귀농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은퇴할 나이가 되어 인생2막을 고민하는 선배나 친구 또는 후배들이 집에서 허구한 날 손자들만 볼 수 없고, 매일 경로당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라 나도 귀농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면 자신있게 말했다. 오라고. 얼마든지 와라. 밥은 먹여주고 일은 시켜주겠다. 그는 도시에서 가질 수 없었던 자신감이 자기도 모르게 축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꼭 빼먹지 않은 충고가 있었다. 귀농하는건 좋은데, 작목을 먼저 선정하고, 귀농 지역에서 얼마동안 살아보길 권유했다. 그래야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실패는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젊다면 금방 재기하겠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재기에 시간이 걸리므로 조금 늦게 2막을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두 가지는 염두에 두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권인수
그는 곧 귀농 2년 차에 접어든다. 기간으로만 본다면 햇병아리일 수 있다. 그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경험했다. 경험처럼 소중한 교육이 없다. 경험이야말로 그 어떤 강의보다 소중한 자양분이다. 최하급의 품질부터 최상급의 품질까지 모두 경험할 것이다. 최하급은 이미 경험했으니 이제 남은건 최상급의 품질이다. 분위기도 좋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2년만에 모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권인수: 010-2295-2403)/특별기고=강성오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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