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꿈, 소쇄원의 소쇄처사> 제73화

문인주는 ‘유서석록’ 마지막 대목을 읽었다.
<소쇄원에 신시에 당도했다. 이곳은 양산보가 지었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밑 물속에는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바닥이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 있다. 이를 조담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인 물이 쏟아져내려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소쇄원에 당도한 일행은 해 지기 전에 식영정(息影亭)을 얼추 둘러보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두 소쇄원으로 가서 국화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고경명은 소쇄옹 양산보의 둘째아들 양자징과 셋째 양자정과 가까이 지내는 처지라 형제처럼 서로 시스러움없이 대했다. 고경명은 10살 위인 양자징보다 8세 연상인 자정과 더 친하게 어울렸다. 그는 이곳에 올 때마다, 소쇄원에서 지척지간인 증암천 건너 성저리에 사는 김성원을 불러 무등산 자락 풍계와 환벽당 앞 청계에서 넷이 술을 마시고 야유를 즐겼으며 소쇄원에서 가까운 서봉사에서 만나 시를 지으며 어울리곤 했다.

소쇄원을 중심으로 식영정 환벽당에서 자주 어울린 광주,담양,장성 등 사림들은 서로 혼인을 맺어 혈연관계가 얽혀 있었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는 광주 땅인 건너 마을 김윤제의 누이와 혼인했고 하서 김인후의 딸을 며느리 삼았다. 또한 송순은 양산보의 고종사촌 형이고 한마을에 살았던 김성원은 김윤제의 당질이며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여사위다. 김윤제는 정철을 이곳과 인연을 맺게하고 손녀사위를 삼았으며 임억령은 양산보와 교유하면서 그의 4종매 되는 양씨와 혼인하여 두 딸을 낳아, 고경명의 아버지와 김성원에게 각각 시집보냈다. 김인후는 유미암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다. 그래서 양산보, 김인후, 송순, 고경명, 임억령, 김윤제,김성원,정철, 유미암 등은 따지고 보면 남이 아니다.

“소쇄원에 올 때마다 사촌 선생이 생각난답니다.”

고경명이 김성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촌 김윤제는 김성원의 당숙으로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김윤제는 박상의 문하에서 임억령과 동문수학하였고 교리를 거쳐 나주목사를 지낸 광주지역의 실력자였다. 임억령이 소쇄원을 출입하게 된 것도 김윤제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김윤제는 나주목사에서 물러난 후 식영정 건너에 환벽당을 짓고 주변의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옛날이 그리워지는구만. 무엇보다 석천 스승님이 서하당에 계실 때가 좋았던 것 같아.”

김성원이 문득 장인 임억령을 생각하며 시름에 젖는 듯했다.

“석천 선생님이 그립기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열다섯 살에 선생님 문하에 출입했고 과거를 보려고 한양에 갔을 때도 필운봉 밑에서 선생님을 뵙고 수학했으니까요. 구름 위에 높이 나는 학과 같이 고결한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고경명이 말했다.

“장인께서 담양부사를 그만두고 장모님을 부인으로 맞아 성산에 송강별서를 지으실 때 저도 문하에 들어갔었네. 이듬해 , 그러니까 경신년 봄에 선생님을 찾아가 문도가 되었는데, 며칠 후 송강이 입문했어. 송강은 석천 선생 문하에 들어온 지 1 년만에 진사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다음해에 장원급제를 했어. 송강 이후로 제자들이 불어나 성산에 학당이 이루어졌다네. 그 때 선생께서 서하당 옆 산록에 식영정을 복축하자 하서. 면앙정 선생님 고봉을 위시해서 많은 시객들이 찾아들었지.”
“경신년이라면 하서 선생께서 세상을 뜨신 해가 아닌가? ”
산행으로 고단했던지 잠시 눈을 감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목사 임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하서 선생님 부음을 듣자 장인께서 통곡을 하시더이다. 만장을 쓰시면서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요. 장인께서 하서 선생을 잃고 울적했던지 그해 여름에 백두산을 비롯하여 여러 명승지를 다녀오셨답니다. 그러면서 김성원은 거문고를 가져오게 하여 연주하면서 장인 임억령이 백두산에서 쓴 시를 읊었다. 거문고 가락과 시를 읊는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방안 가득 울려퍼졌다.

           백두산 암벽에
           천지현황 이후로
           몇 년을 지내왔는가
           알거니 건곤도 응당 늙었기에
           청산 또한 백두가 되었으리

“서하당의 거문고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일품일세 그려. 기암괴석에 폭포수 같기도 하고 학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임훈이 김성원의 거문고 연주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언데 ,그 때 연세가 어찌 되셨기에 백두산을 오를 수 있었어? ”
“예순 다섯이셨습니다.”
임훈의 물음에 김성원이 대답했다.
“지금의 나보다는 젊었구먼.”
“식영정을 복축한 그해 겨울에 하서 선생님이 찾아오셨는데 두 분이 무등산 설경을 바라보며 종일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지으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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