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꿈, 소쇄원의 소쇄처사> 제74화

이날 장인께서 지은 시가 생각납니다. / 임자는 하나의 늙은이 / 대은동에 깊숙이 깃들어 사네/ 사립문 두들기는 사람이 없어/ 대낮에도 이불을 끼고 있다오/ 그대 유독 먼데서 찾아와 주니/ 내 저절로 유흥이 발동하는데/ 무엇으로 호기를 돋구어 줄가.새로 빚은 술이 항에 가득하니 / 평소에는 몹시 참아왔건만/ 오늘만은 양껏 마셔보리라./ 두 분은 이 때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하서 선생이 운명하시자, 장인께서는 애통해 하시며 ‘곡 김후지’를 지어서 스님 편에 부쳤답니다. ”

 “하서 선생 만장은 석천 선생이 쓰시고 제봉은 석천 선생 만사 50수를 짓지 않았던가?”
김성원의 말 끝에 임훈이 다시 물었다. 김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제봉이 쓴 석천 만사를 읊조렸다.
 
하늘에 닿도록 드높은 두륜산 기운, 굼실굼실 내려와 동주에서 막혔구나
지령에 따라 인걸도 가끔 태어나고, 진기한 보배도 많이들 생산되지
공과 같은 그 역량 어디에 비할까. 기린처럼 향기로워라
 
옹서지간이 된 임억령과 김성원의 관계는 누구라도 부러워 할 만큼 정이 두터웠다. 김성원은 장인이 세상을 뜬 후로도 시를 통해 장인을 찬미하였다.
“참, 제봉은 돌아가신 석촌 선생과 호음 정사룡의 꿈을 꾸었다면서? ”
김성원의 물음에 고경명은 희미하게 웃었다.
“꿈속에서 두 분이 대좌하여 경각 사이에 시 일여 편을 쓰는 것을 보았어요.”    
“두 분이 꿈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큰 광영인가.”
“세간 사람들이 당대에 두 분이 시로 쌍벽을 이룬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그런 꿈을 꾸게 된 거로구만.”
“두 분은 교분이 두텁고 서로 높고 낮음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뚝 선 존재들이지요. 서로 왕래하면서 읊은 수창시를 비롯하여 차운시 등을 보면 석천 선생이 44수 호음 선생이 36수나 됩니다.” 

모두들 석천과 호음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그러고 보니 사촌 선생님도, 석촌 선생님도, 하서 선생님도 이제 이승에 계시지 않네요.”
고경명이 잠시 어두운 표정이 되어 탄식했다.
“춘부장 소쇄옹께서 돌아신 지는 아마 십 수 년도 더 지났지요? ”
고경명이 자징과 자정 형제를 보며 물었다.
“십칠 년이 되었다네. 여기 제봉이 제문을 짓고 하서,면앙정,석천,유사,송천,고봉 선생님께서 만사를 썼지. ”

자징이 대답했다.                
“호남사림들이 소쇄원에서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다 소쇄옹 덕분이지요.”
고경명이 임훈을 향해 말하자 임훈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쇄옹과 두 자제분, 그리고 사촌 김윤제 선생, 한 때 성산에 살았던 석촌 임억령 선생, 이 자리에 계신 서하당 김성원 형님, 또한 지척에 계시는 기촌 송순 선생님과 미암 유희춘 선생님으로 인해서 많은 시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지요. 장성 하서 김인후 선생과 고봉 기대승, 석천 선생의 질여서가 되는 옥봉 백광훈 같은 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지요.”
고경명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하고 나서 임훈을 보았다.
“그들 명단에 내 이름 두자도 넣어주게나.”

임훈이 고경명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송강은 이곳을 잊어서는 안 되지. 송강은 석천 선생뿐만 아니라 사촌, 제봉, 기촌, 하서, 그리고 여기 계시는 서하당 등 두루두루 배움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지.   ”
자징도 한마디 거들었다.   

“누구보다도 저한테는 외숙부가 되시는 사촌 선생님의 덕이 크지요.”
자정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송강은 여기 내려와 있다면서요? ”
고경명이 김성원을 보며 물었다.
“작년에 모친상을 당한 후 직제학에 오른 것은 알고 있겠지? 목사님과 제봉이 온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아마 나타나겠지.”
정철은 그 때 36세로 이조좌랑과 함경도 암행어사를 거쳐 직제학에 올랐으나 동인들의 미움을 사 벼슬을 그만두고 잠시 성산에 내려와 있었다.
“참, 제봉이 사촌한테는 종생질여서가 된다고 했던가? ”
“그렇습니다.”

임훈의 물음에 고경명이 대답했다.
“면앙정 선생께서는 요즘도 강녕하십니까? ”
고경명이 자징에게 물었다.
“우리 형제가 지난 설에 세배를 갔었는데 댁에 강건하게 잘 계시데.”
“올해 연세가...?”
“여든 하나시지요.”
“나보다 일곱 살이 위시지.”   
자정의 대답에 임훈이 곁들였다.
“장인어른께서 병을 얻어 해남에 내려가 계실 때 들은 이야기인데 미암 선생이 보신하라고 노루를 잡아서 가져왔다고 자랑을 하시었네.

김성원은 이조참판 미암 유희춘에 대해서도 간단히 근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석천 선생과 미암은 어려서부터 해남의 주산인 만대한 아래 같은 골짜기에서 살았지요. 두 분은 같은 골짜기 하천과 바위 이름을 따서 석천과 미암이라는 아호를 자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성원의 말이 끝나자 고경명은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장성의 고봉 기대승이 고향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말했다. 이들은 이날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술을 마시며 시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특히 먼저 세상을 뜬 소쇄옹과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석촌 김윤제를 그리워하였다. 밤이 늦어서야 고경명은 임훈을 모시고 그의 은행정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소쇄원에서 유숙했다.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식영정과 환벽당을 둘러보고 기촌으로 가서 송순께 인사를 드리자고 약속했다.    

버스가 소쇄원 앞에서 멈추자 문인주와 최 선생은 서둘러 내렸다. 문인주는 땅을 밟는 순간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보며 무등산부터 찾았다. 지척인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등산이 보이지 않으면 허전하고 답답했다. 그에게 무등산은 흙과 돌과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자연의 덩어리가 아닌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가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도 무등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 품고 살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도 무등산이 보이지 않네요.”
“이 사람아, 앞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나. 큰  산만 작은 산을 가리는 것이 어니여. 사람도 마찬가지지. 세상 이치가 그렇다네.
“아, 참 그러네요. 식영정 쪽으로 내려가면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문인주는 거듭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 유둔재 너머 장단까지 가는 225번 버스가 멈추자 최 선생이 서둘러 올라탔다. 문인주는 버스에 타지 않았다. 그는 최 선생을 향해 손을 흔들고 ‘먼저 가세요’ 라고 소리치고 나서 식영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무등산을 보기 위한 것보다는 유서석록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식영정과 환벽당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서다. 식영정까지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무등산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등산 쪽에 시선을 주면서 조금 전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릴 수 있다’ 는 최 선생의 말을 거듭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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