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76화

월요일, 소쇄원은 한산하다. 방학을 제외하면 주초에는 언제나 방문객이 뜸하다. 정오가 되도록 단체관광객이 한 팀도 없어 문인주는 오전에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낮게 가라앉았으나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느지막이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스무 명 남짓 되는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문인주는 도시락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제월당 마루 끝에 걸터앉아 대밭 사이길로 올라오는 방문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봉대 앞에 한참동안 머문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작가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카메라를 멘 중년 남자가 손짓을 해가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대봉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그냥 사진 찍고 휑하니 지나가는 뜨내기 방문객들이 아닌 듯싶었다. 행색으로 짐작하건데 대학생들 같아 보였다. 그들이 애양단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문인주는 천천히 일어나 대봉대 쪽으로 내려갔다.

“이 그루터기가 원래 대봉대 앞에 있었던 큰 오동나무 뿌리가 맞습니까? ”
카메라를 멘 중년남자가 문인주가 해설가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고 물었다.
“맞습니다.”
“교수님 말이 맞았어요.”
문인주의 대답에 카메라는 멘 남자 옆에 바짝 붙어 선 무릎이 너덜너덜한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어느 대학에서 오셨습니까? ”
문인주는 그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물었다.
“한국대 국사학과 삼학년 역사기행 팀입니다.”

교수 옆에 있던 큰 키에 잘 생긴 남학생이 문인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까지 했다. 교수는 애양단 앞을 지나면서, 원래 담장에는 하서의 소쇄원48영 시가 걸려 있었는데, 담장이 홍수로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고 설명했다. 문인주는 홍수가 애양단 담장을 무너뜨린 때가 언제냐고 물어볼까 싶어 심신이 죄어들었다. 기실 애양단에 48영이 걸려있었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교수는 효심이 지극했던 양산보를 설명하면서 그가 쓴 효부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교수는 소쇄원에 대해서 문인주보다 훨씬 아는 것이 많아 보여 은근히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교수는 제월당에서 광풍각에 이르는 동안 그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교수님, 양산보의 손자 양천경과 양천회는 왜 정여립사건 때, 이발. 이길 형제와 백유양. 정언지.정언진 형제 등을 공모자이니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답니까? ”
일행이 광풍각 앞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잘 생긴 남학생이 뚜벅 물었다. 교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저도 궁금해요 교수님. 양천경 형제가 이발 형제와 특별히 원한관계도 아닌데 말입니다.”
“기록을 보면 호남 유생들 50명 이름으로 이 상소를 올릴 때, 나이가 가장 많은 동복출신 정암수를 소두로 내세웠으나 실재로 뒤에서 조정한 사람은 양천경이었다지 않아요. 광주 출신 이발 형제의 죄를 물어야한다는 데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양천경의 의도대로 처리되었다고 했습니다.”

“양천경은 다음해에도 정언신을 처벌해야한다는 소를 올려 죽게 했고 이어서 역적의 수괴로 지목된 길삼봉이 최영경이라는 소를 올려 죽게 했어요. 최영경 역시 이발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지 않아요.”    
“양천경 양천회 형제는 왜 수 많은 동인들, 특히 이발과 가까운 사람들을 골라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을까요.” 
“결국 이발과 정철의 싸움에, 아니 서인이 동인을 치는 싸움에 양천경 양천회가 이용당했다는 거가 맞지.”
“좋은 벼슬자리 주겠다고 시골 선비를 꼬셨겠지.”
“왜 하필이면 양천경 형제를 사주했을까.” 
“헌데 교수님, 이발과 정철이 앙숙이었다는데 사실입니까? ”

잘생긴 남학생이 교수에게 물었다.
“이발이 누구인가. 그의 조부는 홍문관 박사를 했고 아버지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호남 제일의 명문가로 젊었을 때부터 정철과는 사사건건 맞서 서로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 
교수는 이발에 대해 이야기했다.
“ 이발이 정철의 누이는 인종의 귀인이요, 또 한 누이는 선조의 종숙 계림군의 처이며, 형의 딸인 조카는 선조의 귀인이라면서, 출세를 위해서 장부답지 않게 미인계를 쓴다면서 정철을 비난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교수는 이발과 정철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번은 김장생의 부친 회갑잔치에 두 사람 모두 만취해서 이발과 정철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움을 했다. 이 때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뽑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발의 조모 신 씨 부인이, 손자에게 수염을 뽑힌 정철이 어떻게 하더냐고 물었다. 정철은 허허 웃으며 몇 가닥 안 되는 수염을 그대가 뽑았으니 이 몸 풍채가 더욱 초라하게 되었구나 하고 말하더라고 했다. 그러자 조모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정철이 호랑이상인데, 호랑이가 수염을 뽑히고도 화를 내지 않고 웃고 갔다면, 훗날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며 그 일로 가문에 화가 닥칠까 두렵다고 했다. 이발의 조모 신 씨는 사서삼경을 읽었고 역학에 능해 세상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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