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79화

“한 학생이 양산보 후손과 정철 후손은 지금 사이가 좋으냐고 묻더라고요.”
“나쁘지는 않아. 정유재란 때 소쇄원이 불탔을 때 복구하는 동안 양산보 자손들이 계당에서 살기도 했으니까. 물론 정철 후손인 지실정씨와 이발 후손인 광주이씨 사이는 통혼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말이야. 지금도 광주이씨들은 송강송강하면서 무를 벤다고 하더라고.”
“결국 훗날 정여립 사건 연루자들 대부분이 명예회복이 되었고, 정철도 두 아들이 소를 올려 신원이 되었으나 양천경 양천회 형제는 복권이 되지 못했구만요.”
“그렇지? ”
“선생님은 정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기축옥사에서 보여주었듯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었습니까?  정말 양천경 형제를 사주했을까요? ”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이용단한 거지. 당시 선조 입장에서는 신진 개혁세력이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하고 모두 척결할 계획을 했으니까. 선조 개인의 동인 견제 심리로 옥사가 확대되었고 고집물통이고 타협하기 싫어하는 정철이 선조의 명에 충실하게 따른 거야. 선조는 이발과 최영경 등을 죽이게 된 모든 책임을 정철에게 뒤집어 씌웠어.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도 북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것이라 공정성에 문제가 있고.... 이건창이 쓴 ‘당의통략’ 을 보면 ‘정철이 선조에게 이발이 정여립과 사귀었으나 좋아해서 나쁜 것을 알지 못했을 따름’ 이라고 죽이는 것을 반대했으나 듣지 않았다는 거야.”     

“암튼, 양천경 양천회 형제가 소를 올린 것은 잘못이었어요.”
“암, 상소 때문에 이발. 이길 형제를 비롯해서 조대중. 정개청. 나사침. 나덕명 같은 호남의 유력한 신진사림들이 목숨을 잃었고 최영경. 정개청 같은 인재를 잃게 되었으니...”
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문인주의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솔직히 저는 정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

한참 후에 문인주가 끈적하게 어둠이 달라붙은 추 선생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 같어. 환경에 따라서 좋은 사람도 되고 나쁜 사람도 되고...”
“하긴, 나쁜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아요.”

다시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어둠은 점점 두꺼워지고 바람에 대숲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되풀이했다. 알 수 없는 벌레소리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밤이 되면서 낮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소리들이 서서히 되살아난 듯싶었다.
“저 물소리 말이야. 꼭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같지 않은가? ”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더 시끄럽게 들리지요? ”  
“개울 속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우리들이 돌아가면 구물구물 기어 나올지도 모르지.”
추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푸하 하고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선생님은 여기 나온 지 몇 년 되셨죠? ”
“올해로 십삼 년짼가?”
“그동안 꿈 한 번도 안 꾸셨어요? ”  
“꿈? 무슨 꿈? ”
“양산보 꿈 말이어요.”
“꾸었지.”
“꾸었어요? 정말 꾸었어요? 그래 어떤 꿈을 꾸었어요? ”

문인주는 추 선생 옆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다급하게 재우쳐 물었다.
“선비들과 어울려 탁족하는 꿈, 그리고 제월당에 앉아서 글 읽는 모습, 여럿이 어울려 술마시는 모습....”
“그것 뿐이어요? 말도 해봤어요? 궁금한 것 물어보기도 했어요?”
“말은 안 해봤는데? 왜 그러나? 자네도 양산보 꿈을 꾸었는가? ”
“아니요.”

문인주는 어둠 속에서 고개까지 흔들며 강하게 부인을 했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해설사들 중에 꿈을 꾼 사람 있습니까? ”
“있겠지. 여기에 십 년쯤 있으면 아마 꿈을 꾸게 될 걸세. 자네는 아직 십 년이 못 되어서 꿈을 꾸지 못 한 걸 거야.”  
“.........”
“ 혼자 여기 앉아 있노라면, 내 눈 앞에 옛날 여기에 드나들었던 선비들이 떼를 지어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을 보네.”
“떼를 지어서요? ”
“먼저 지나가는 무리는 소쇄옹을 위시해서 송순, 김인후, 김윤제, 임억령, 유희춘이 지나고 한참 있다가, 자징과 자정 형제가 고셩명, 기대승, 김성원, 정철, 백광훈과 함께 지나간다네.”
“그 다음에는 누가 지나갑니까? ”
“소쇄옹의 손자 양천운이 혼자 쓸쓸하게 지나가지.”
“그 다음에는요? ”
“글세... 모르겠네.”      
“자네 생각에는 누가 지나간 것 같은가? ”

문이주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생각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밤이 어두워서야 소쇄원에서 나와 함께 소주를 반주로 저녁을 먹었다. 문인주는 오랜만에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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