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1화

“저는 말입니다. 제가 인생은 허무하다,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말할 때 누구인가, 반대편에서 아니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거 어떤 철학자가 한 말 같은데? ”
“그래요? 오늘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인데요? 그나저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진주 때문인가요? 이제 진주는 그만 포기하세요.”
“실은 어제가 죽은 마누라 제삿날이었다네.”
“아, 그랬구만요.”
“헌데 마누라 죽은 후 칠 년 동안 내 삶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생각되었네. 칠년 동안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이며 만났던 사람들, 생각과 말들, 행위들이 모두 공소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졌네. ”

“그래도 선생님은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많은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거년 겨울이었던가요. 밤중에 제 집으로 뛰어와서 깊이 잠든 저를 깨우고는 다산의 ‘노을치마’에 대한 글을 읽었다면서,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지 않아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지 십 년째 되는 날, 그의 부인 홍 씨가 열다섯 살에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남편의 책 표지로 쓰라고 보내왔다고 했지요. 삼십사 년이 된 그 다홍치마는 빛이 바래 글씨 쓰기가 적당했는데, 다산은 그 치마를 마름질해서,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훈계하는 말을 적고 하피첩(霞披帖)이라는 작은 책자를 만들어 학연과 학유에게 주었다면서, 다산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그랬었지.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에 시집간 딸을 위해 매화가지에 앉은 한 쌍의 새를 그린 ‘매화병제도’를 그려 보냈다네.”
그러면서 최 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다산이 쓴 ‘매화병제도’ 라는 시를 읊었다.
 
  펄펄 나는 저 새가
  집 뜰 매화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기 짙어
  즐거이 날아왔네
  머물며 지내면서     
  집안에 즐겁게 살려므나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구나         
                       
“헌데 말이야, 하피라는 것은 중국 당송 때 신부가 입은 혼례복인데 왜 홍군(紅裙)이라고 쓰지 않고 노을하자 (霞)를 써서 노을치마라고 했을까. 아마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걸 거야.” 
“저는 혼인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남편에게 보낸 홍 씨 부인의 애틋한 마음이 노을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구남매를 낳았으나 아들 넷과 딸 둘을 잃고 남편마저 유배지로 떠나보낸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도 남편에게 다홍치마를 보낼 생각을 하다니...”
“다 부질없는 일일세. 노을빛 같은 사랑도, 애틋한 마음도, 그 것을 알고 감동했던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일세. 앞으로는 책도 읽지 않으려네.”

“책도 안 읽고 하루하루 어떻게 보내시려고요?”
“ 모든 것이 부질없음이야. 안다는 것도 느낀다는 것도 다 부질없음이야. ”
“오늘 저도 쉬는 날인데 외식이나 할까요? 우울할 때는 아주 단 것이나 기름기가 진덤진덤한 고깃국을 먹으면 좀 나아지거든요.”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네.”

최 선생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휘적휘적 마당을 가로질러 집 밖으로 나갔다. 진주가 꼬리를 치며 뒤를 따랐다. 최 선생은 진주가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쫓지 않았다. 문인주는 한동안 바윗돌에 짓눌린 표정으로, 어떻게 하면 최 선생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싶어 최 선생이 사라진 마을길을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무튼, 정오쯤에 최 선생과 함께 외출해서 시내구경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온 문인주는 유서석록 마지막 대목을 다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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