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대형 태풍 술릭이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연일 뉴스를 타고 곧 큰 피해가 예상될 것 같아 모이는 사람들마다 태풍 걱정이었다. 그런 태풍이 별 탈 없이 지나가자마자 예상치 못한 집중 호우가 내렸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태풍의 바람에 비닐하우스가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기도 하지만 하우스에 비닐이 없을 경우 폭우도 걱정이 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비닐 씌우기 작업이 시작되고 뒤 이어 모종을 캐고 심는 작업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농사에서 때를 맞추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하는 것보다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농촌도 많이 변했다. 어울려 살던 세대는 경로당으로 밀려났고 그 자리를 외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채워지기 시작했다. 동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인사를 나누고 지나쳤지만 요즘은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공동 작업이 필요한 농사일도 돈만 들이면 인부들을 사서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이 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홀로 깊은 산골에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방송이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혼자 집을 짓고 혼자 농사를 짓고 그렇게 산다면 결국 혼자 죽을 것이다. 이 방송이 인기 있는 것은 이처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외롭게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삶의 방식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릴 적 허리 구부려 품앗이 모내기를 시작으로 벼를 벨 때까지 마을 사람들의 일정은 모두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지붕이엉을 갈 때도 관혼상제가 발생해도 마을은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이 시스템에는 보이지 않은 법도가 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제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는 배고픔을 모르고 품앗이를 모른다. 굳이 연(緣)을 맺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무리가 없다. 삶의 모든 단계가 혼자서도 웬만큼은 할 수 있다. 국가나 지방의 복지 정책도 이런 변화된 사회 시스템을 지원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주변에 노총각과 노처녀가 많아졌다. 황혼이혼을 하여 혼자 사는 노인들도 많다. 홀로 자녀 세대라서 형제자매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 한 세대가 세상을 떠난다. 연고(緣故)가 없으니 앞으로는 장례식에 찾아 올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멀리 있는 친척들과 연고자들의 방문을 위해 3일장 5일장 하던 장례도 이제 간소해졌다. 벌써 장례식을 생략하고 바로 화장하는 직장(直葬)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공원묘지가 있고 묘지 관리업체가 있어 일정한 요금만 내면 굳이 내가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추석이 다가오면 온 동네가 낫 들고 벌초하는 공동 작업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시제를 모시는 세대가 떠나고 나면 온 산천의 조상 묘는 자칫 무연고 묘지가 될 가능성이 많아졌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대는 무연고(無緣故)사회보다는 아름다운 연고(緣故)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내 자식들이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누리는 삶이되기를 희망한다. 무연고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것을 겪어봐서 알기 때문이다. 어울려 사는 사회가 마음에 그리는 아름다운 사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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