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2화

<식영정에는 해질 무렵에 당도하였다. 이곳 식영정은 일행인 강숙 김성원이 지은 별장이다. 식영과 서하의 두 액자는 그 모두가 박영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요, 서하는 전자체로 씌여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모란,작약,해당화,왜철쭉 등이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난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주고 있다.
4월 스무나흘
환벽당은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 아침에 창평 현령 이효당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이만인)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마치 피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판관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했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의 영봉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난 문인주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431년 전 고경명이 보았던 식영정과 환벽당이 2014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가를 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지금도 모란이며 해당화, 왜철쭉이 피었는지 궁금했고 식영정에서 증암천 거너 환벽당이 보일지 보이지 않을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바쁜 걸음으로 남도마당 앞까지 걸어 나와 20분 쯤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문인주의 머릿속에는 술이 취해 식영정 소나무 그늘 밑에 깊은 잠이 빠진 고경명의 모습이 자꾸만 맴돌았다. 후세 사람들이 성산사선(星山四仙)이라 일컬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정철이 정자에 지필묵을 놓고 앉아서 시를 짓고 읊어대는 모습이 바람과 함께 언뜻 언뜻 스치기도 하였다.

소쇄원 앞에서 하차한 문인주는 가사문학관 쪽으로 내려가면서 여러 차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증암천 물을 따라 내려갈수록 무등산이 우줄우줄 춤을 추듯 커졌다. 가사문학관의 커다란 표지석 앞을 지나, 고서-광주-소쇄원으로 연결되는 삼거리에 이르러서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돌려 보았더니 무등산의 우람한 몸통이 하늘 닿게 덩실 떠올라 있었다. 무등산을 온전히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소쇄원 안에 있을 때는 대나무숲과 앞산에 가려 무등산을 볼 수가 없는데, 원림 밖으로 나와 멀어질수록 무등산은 점점 뚜렷하게 살아났다.  

그는 한참동안 삼거리에 서서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토요일이라 조금 전에 지나쳤던 소쇄원 주차장은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식영정 옆 주차장은 한산했다. 그는 “소쇄원과 식영정 중에 어디가 방문객이 더 많으냐” 고 물었던 대학생의 물음이 생각나 희미하게 웃음을 날렸다. 정철의 문학과 삶의 흔적들이 깊게 새겨진 식영정을 찾는 사람보다, 젊은 선비가 세상이 싫어 꿈을 접고 은둔한 삶터, 소쇄원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그는 가사문학관 안에 있는 찻집 ‘달빛 한잔’ 간판을 발견하고 갈증을 느꼈으나 참기로 했다. 그는 가끔 진한 커피 에스프레소가 생각나면 ‘달빛 한잔’에 들르곤 했는데, 커피 한잔이 유혹하는 사치스러운 도시취향을 털어내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가사문학관 앞 삼거리에는 도시 못지않게 자동차 통행이 많아,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한동안 서 있어야만 했다. 이곳을 일동삼승 (一洞三勝)이라 한다던가. 한 동네에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 세 가지 명승이 어깨를 마주하고 존재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일컫는다. 그리고 이 공간은 송순, 김인후, 이서, 정식, 남극엽, 유도관, 남석하, 김윤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임억령, 고경명, 유희춘, 양응징, 양응정, 정철, 양천운, 김덕령, 정홍명, 정해정 같은 시인묵객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문인주는 식영정부터 오를까, 아니면 환벽당에 먼저 가볼까 망설였다. 유서석록에서 고경명 일행은 소쇄원에 당도하자마자 식영정을 먼저 찾고 하룻밤을 쉰 다음날 환벽당으로 갔다. 문인주는 식영정을 먼저 찾기로 했다. 늙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서서 잠시 숨을 돌렸다가 적막한 그림자가 무겁도록 깃든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옛 시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모았다. 그동안 서너 차례 식영정에 왔었지만, 유서석록을 읽고 난 후라서인지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돌을 밟고 한 계단씩 토파 오를 때마다, 별뫼 언덕 노송들이 우줄거리며 한 뼘씩 더 높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식영정이라, 식영정이라, 그림자가 쉬는 정자라 ? 하고 마음속으로 수 없이 되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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