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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10) 기당 이한기 박사담양이 낳은 첫 총리 ‘기당 이한기 박사’

올해 탄신 100주년 맞아 최근 기념문집 발간
유사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법학자·교육자·공직자로 칭송
서울대 법대 교수·학장 역임, 감사원장·국무총리로 공직 봉사

조선말 위정척사 선봉 창평 장전마을 이최선의 4대손
증조부 이승학과 조부 이광수도 외세배격 ‘의병활동’
부친 이혁은 전남대학 교수로 초대 문리대학장 지내
세계 최초 비날론 발명 이승기 박사가 6촌형

▲기당 이한기 박사(前국무총리)

“대쪽 같은 기개와 충절, 선비의 고장 담양”

예로부터 우리 담양은 기개와 충절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이자 의향(義鄕), 예향(藝鄕), 문향(文鄕)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다. 유사 이래 대대로 이어져 온 대쪽 같은 담양인의 성품과 충의의 정신, 의(義)를 알고 예(禮)를 실천하며 시문을 꽃피웠던 옛 선조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이 전하는 고려, 조선시대,구한말은 물론이고 근,현대기에 걸쳐 담양은 어느 고장보다도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가까이는 그리 멀지않은 시기에 선각자 고정주 선생이 영학숙, 창흥의숙을 개설해 교육 열기를 불어 넣었을 뿐 아니라 고광순 의병장의 빛나는 의병투쟁, 석전 이최선의 위정척사 및 외세배격 등 담양의 전통 명문 성씨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애족 활동이 적지 않았다.

이들중 석전 이최선은 창평 장전마을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3대왕 태종의 후손이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증손이자 순성군(順城君)의 손자 추성수 이서(李緖)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담양 창평으로 유배되고 유배에서 풀린 후에도 귀경하지 않고 담양에 눌러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담양 곳곳에 정착,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석전공의 집안은 장전마을에 정착했다. 이후 창평 장전마을은 태종-양녕대군-추성군 이서로 이어지는 계보 아래 석전 이최선과 그의 후손들까지 대대로 조선왕조 이씨 종친들의 명문가로 세대를 이어가게 된다.

창평 장화리에 뿌리내린 조선왕족 이씨 가계도
기당 이한기 박사는 의병家 석전 이최선의 4대손

이최선(1825~1883)은 추성수 이서(李緖)의 12세손이며 슬하에 승학,승구,승서,승한,승태 등의 아들을 두었고 이중 기우만과 함께 장성의병 활동에 적극 참가한 장남 이승학(1857~1928)은 광수,돈수,명수,중수 등의 아들을 두었다. 승학의 장남이자 이최선의 손자인 이광수(1873~1953)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해 암살에 나섰으나 사전 발각돼 사형을 언도받았다.

손자 이광수는 이혁, 이순 등 아들을 두었고 이최선의 증손자로 전남대 초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이혁(1898~1977)은 기당 이한기(1917~1995) 박사를 장남으로 두었다.
따라서 조선말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애족의 위정척사와 의병활동, 빈민구제에 온 힘을 쏟았던 창평 장전마을의 선비 석전 이최선의 고손자(4대손)가 바로 서울대 법대학장을 지낸 이한기 박사(전.국무총리)이다.

담양출신 첫 국무총리 ‘이한기 박사’
서울대 법대교수·학장 역임, 감사원장 지내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 박사(1917∼1995)는 우리 담양이 유사 이래 첫 배출한 ‘국무총리’ 이다.
이한기 박사 이전과 이후에 담양출신으로 국무총리에 오른 이는 아직 없을 만큼 특별한 인재였던 이한기 박사는 ‘국무총리’ 라는 ‘一人之下 萬人之上’ 최고관직의 명성과 관록보다도 당대 가장 인품 있고 존경받는 법학자·교육자로 세간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30여년간 법과대학 교수로 국제법을 가르치고 법대학장을 역임했으나, 정국이 혼란했던 80년대에 국가의 부름을 받아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에 임명돼 당시 국가위난의 시기를 대화와 타협, 그리고 특유의 소신과 강직함으로 지혜롭게 잘 해결해 나감으로써 지금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많은 정치인, 법조인, 교수, 학자, 문인, 언론인들이 기당 이한기 박사의 서울대 제자들이며 이들 중 적지 않은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기일에 담양 창평의 장전마을 묘소를 찾고 있음을 볼 때, 비록 그가 지금 우리 곁에는 없지만 ‘虎死留皮 人死留名’ 속담의 진면목을 체감할 수 있다.

▲기당선생의 생가 '영서당'

고향을 너무나 그리워한 학자 기당 선생
무등산의 상서로운 기운 받는 생가 ‘영서당’

기당 선생은 생전에 고향마을인 창평 장전의 생가 ‘영서당(迎瑞堂)’을 자주 찾았으며 작고하기 전에는 묘비명 까지 미리 써 놓았다. 다음은 그가 생전에 미리 남겼던 묘비명(자작시)이다.

무등산 떠도는 구름을 보며
영서당(迎瑞堂) 뜰에서 뛰놀던 아이
고향 떠나 한평생 유랑이었네
방황이었네
고난이었네
덧없는 세월 속에 흰머리 이고
진밭골 찾아오니 청산이 반겨주네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들
이곳에 다 모여 있어라
내 못다한 사랑
길이 길이 바치고져.   

이한기 박사가 타계하기 약 2년전인 1993년 3월경 직접 지은 고향사랑의 절절함이 뭍어나는 자작시(自作詩)이며 현재 선생의 묘소 앞 묘비에 새겨져 있다. 평생을 고향과 고향사람들, 그리고 조상들이 묻힌 장전마을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이다.
선생이 생전에 자주 찾았던 장전마을 생가 ‘영서당(迎瑞堂)’ 은 맞을 영(迎) 상서로울 서(瑞),집 당(堂) 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며, 집 뜰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 영서당의 뜰에서 바라보이는 상서로운 기운(瑞)은 바로 ‘무등산(瑞石山)’을 의미 하기도 한다. 무등산의 상서로운 기운을 품고 받는 집이라는 뜻이다.

# 기당 선생이 생전에 미리 써놓은 자작시 묘비(사진=지난 10월 22일 선친 묘소를 찾은 장남,차남 등 후손들)

올해가 이한기 박사 탄신 100주년
담양을 상징하는 ‘대쪽선비’ 기당 선생
담양의 인물 재조명, 현창사업 서둘러야

기당 이한기 박사는 1917년생으로 지난 1995년에 향년 79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따라서 올해가 탄신 100주년이며 타계 23년째 된다. 이에 기당 선생의 많은 제자들과 지인, 유족들은 기념문집 발간위원회를 구성하고 얼마전 조촐한 기념행사와 함께 ‘기당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을 발간했다.

 올해 10월초 발간한 기당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에는 박병호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축사를 썼으며 이낙연 총리가 기념사, 이수성 전.총리와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이 추모사로써 선생을 추모했다.

이외에도, 강종일(정치학박사,한반도중립화연구소장), 김만기(전.감사원 사무총장), 김석우(전.통일원 차관,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장), 김수웅(한일문화교류기금 상임이사), 김진환(전.서울지검장,서울대법대총동창회장), 김철(숙명여대 명예교수), 윤증현(전.금융감독원장,기획재정부 장관), 이시윤(전.헌법재판소장,감사원장), 이장희(한국외대 부총장), 장기표(전태일재단 이사장,새정치연대 대표), 황영하(전,감사원사무총장 ,전.총무처장관) 등 수십명이 추모의 글을 비롯 선생의 학덕과 인품, 그리고 생전을 회고하는 글을 실을 만큼 많은 제자들을 두고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렇듯 정계,법조계,학계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유명인들로 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기당 이한기 박사의 생애와 업적이 정작 자신의 고향 담양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들어 담양군이 역사시대와 근,현대기를 포함해 위대한 족적을 남긴 ‘담양의 인물’에 대한 현창사업을 추진 중 임을 고려할 때, 마땅히 기당 선생이 그 범위에 우선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묘비에 새겨진 기당 선생의 발자취
학문적·사회적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 남겨

기당 이한기 선생은 서기 1917년 10월 20일(음.9월5일) 학인지사(學人志士)의 고장인 담양 창평 장화리 장전에서 故춘전 이혁 公과 해남윤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생은 전주이씨 양녕대군 제19세손이며 명망 높은 유가(儒家) 가문의 후예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로 민족의 울분이 충천한 기미 3.1운동 후의 시점에 선생은 민족의 진로가 혼미하였던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개화와 실력배양만이 민족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출중한 재능에 따라 일본의 최고 명문학부인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해 법률학을 전공했다. 이후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에 유학해 국제법을 연구했으며 대학졸업 후 학병거부로 신고를 겪고 해방을 맞아 교육학자의 길을 택했다.

선생은 근 30년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법과대학장, 사법대학원장, 법학연구소장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준재들을 훈도하여 학계, 법조계, 관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 배출했다. 선생은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신조로 학문의 길을 닦고 엄격하고 인자함을 함께하며 교육에 임해왔다.
‘도리불언 하자성예(桃李不言 下自成蹊)’라..선생의 지고한 학덕으로 인해 문하에는 영재들이 다투어 줄을 잇고 대성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국제법 학계에서 태두로 1인자로서의 명성을 지녀왔으며 특히 조국의 영토문제에 관한 연구가 선생의 업적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민족적 관심을 학문적 관심으로 전환시킨 애국학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선생은 언제나 출람의 후진을 고대해왔으나 선생의 자리를 이어가 주는 학자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 선생은 여전회 독보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선생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인 한국의 영토에서 독도영유권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어 종신토록 학자로서의 최고 영예를 누리셨다.

선생의 투철한 법적 정의감과 청렬한 인품으로 해서 사회기강이 어지러운 때에는 사정기관인 감사원장의 요직에 특청되었고 사회와 나라가 민주화 진통의 혼란에 빠졌을 때는 중망소귀로 국무총리의 중직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은 필생 고명한 학자 교육자로서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현직을 수행하는 동안 현량부인 류판례 여사의 숙덕과 내조의 공이 지대하였으며 서기 1976년 9월9일 향년 62세로 선생에 앞서 타계하셨다.

슬하에 장남 종웅과 차남 종걸과 4녀로 종순,종만,종애,복순을 두어 모두 사회 및 가정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었다. 자부 조인봉,정대봉,그리고 서랑(사위) 정득규, 김형기, 정병준, 박남구가 가정의 울을 이루어 화목을 다지고 있다. 또한 용태,봉태,학태,인태,문태 등 친손들이 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저명한 성악가 김혜경 서울음대 교수와 속현하여 현철한 내조를 받다가 서기 1995년 2월 2일 향년 79세로 영면하셨다.

선생은 높이 존경받는 대학자 교육자, 그리고 경륜 높은 사회적 지도자로서 일생동안 국가 사회를 위해 존귀한 기여를 하였고 널리 모범이 되는 훌륭한 가정을 이루었다. 큰 별이 떨어졌지만 선생의 고매한 정신과 유덕은 후생들의 맥을 통하여 온 사회에서 영원히 숨 쉴 것이다. 만고에 만상을 비쳐주는 해와 달이여! 청산을 밝게 비쳐주오이다.(기당 선생 묘갈명)

# 기당 이한기 박사 묘소(창평 장전마을)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에 수록된
기당 선생의 제자, 지인들의 회고담

●제자 이수성 전.총리
(이한기 박사 서울대 법대 교수시절 제자)
“한 세대 30여년 계속된 정치, 사회적 기복과 격변을 겪으면서도 선생님처럼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신 분을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고명하시고 자상하신 선배로, 진정한 신사가 실체화 될 수 있다면 선생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또한 선생님 자신이 바로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향을 바로 잡으신 선각자 이셨죠. 선생님은 평생 관직을 탐하지 않고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으셨으며, 민족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경우에도 진실로 성심을 다해 임하셨을 뿐이셨습니다. 기당 선생님은 학자시며 애국자셨습니다.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고 편견없는 혜안을 갖고 계셨습니다. 일방적인 사정기관 감사원장 임명에도 최선을 다해 성과있는 원장직을 수행하셨지요. 특히,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의 기로에 당면했던 6월 항쟁의 정국에서 계엄반대, 명동성당 농성 해결, 그리고 국무총리로서 6.29선언을 유도해 내어 민주화의 방향으로 역사의 물길을 돌린 이한기 총리의 용기있는 결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추모사 中)”

●이낙연 국무총리
(이한기 박사 서울대 법대 교수시절 제자)
“기당 선생님의 독도사랑 역저인 ‘한국의 영토’를 선생님은 한일병합의 전초전에서 희생된 독도를 일본의 새로운 침략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나름의 민족주의적 표현이라고 자평하셨습니다. 독도의 독도박물관에는 이 책 서문의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구가 걸려있습니다......

훗날 전두환 전.대통령이 ‘내가 집권한 기간동안 대통령 명령을 듣지 않은 총리는 이한기 총리뿐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48일간의 총리서리 재임동안 전두환 정권은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라든가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요구했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듣지 않고 대화로 풀어내셨습니다. 선생님의 좌우명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그 시절에도 실천하실 것일까요?(기념사 中)”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 
(이한기 총리시절 총리실 의전비서관 재직)
“선생님은 민주화를 하지 않고는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셨고, 이를 직접 거론하게 되셨다. 이는 참으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총리실 간부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 총리는 간부들에게 먼저 소신을 밝히시고 며칠 뒤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씨를 직접 만나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설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6월 29일 소위 ‘6.29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인 광경을 목도하면서 기당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학자로서의 엄정성, 균형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용기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표하게 되었고, 앞으로 삶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 제자들이 세운 묘소 옆 추모비

<기당 이한기 박사 연보>
●1917년 9.5(음)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 489번지에서 출생
●창평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제4고등학교 문과 졸업,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졸업, 서울대 법대 법학박사, 미국 콜롬비아대 법대 유학, 서울대 법학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과대학장, 서울대 사법대학원장, 대한국제법학회장, 학술원 회원, 감사원장,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 국무총리.
●저서로는, 현대국제법(1952), 국제조약집(1958), 국제법학(상,하/1958,1960), 한국의 영토(1969), 국제법강의(1972), 제3차 해양법회의와 한국경제(1976), 근대화와 국제법 법정(1975), 한국 및 일본의 개국과 국제법(1980), 영서당記(1986) 외에 논문 수백편, 수필 수십편 등이 있다. 
●기당 선생은 서울대 10년 및 20년 근속표창, 정부 국민훈장 동백장(1970) 및 청조근정훈장(1982) 등을 받았다.  / 장광호 편집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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