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4화

문인주는 지붕에 기와를 얹은 낮은 쪽문을 허리 구부리고 지나 돌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길이 가파른 탓으로 식영정 오를 때보다는 숨이 헉헉 차올랐다. 돌계단 언덕에 상사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송시열이 쓴 환벽당 제액이 눈에 들어오면서 푸른 숲에 에워싸인 정자가 날개를 펼치듯 하늘로 솟아올랐다. 옛날에는 사방이 푸른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환벽당이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대나무 대신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은행나무, 오동나무, 단풍나무들이 띄엄띄엄 둘러 있었고, 전각 뜰아래 오래된 배롱나무가 높이 솟아 가냘프게 바람에 흔들렸다. 문인주는 전각에 오르자 버릇처럼 또 남쪽 하늘 끝을 보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무등산은 오동잎 크기만큼 조각이 나 있었다. 무등산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가운 마음으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압보촌에 다시 가보지 못한 것이, 마치 숙제를 뒤로 미루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찜찜했다.

환벽당에서 내려온 문인주는 넉넉하게 흐르는 창계를 내려다보며 잠시 망서렸다. 그곳에서 두 그루 노송을 바라보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난 담장길을 따라가면 취가정(醉歌亭)이 나온다.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마음으로 후손 김만식 등이 지은 정자이다. 노래에 취하는 정자라, 문인주는 몇 년 전 정자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거나하게 술에 취한 채 한달음에 달려왔었다. 환벽당 주인 김윤제는 김덕령의 종조부가 된다. 문인주는 발걸음을 돌려 다리 쪽으로 걸어나와 충효리로 향했다. 이 마을은 김윤제,김성원,김덕령의 태생지이다. 광주댐 생태공원이 된 마을 입구에는 늙은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김덕령 장군의 탄생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올해로 수령 444년이 된다. 문인주는 왕버드나무 그늘 밑에 앉아, 양산보의 처남이며 환벽당 주인인 김윤제와 임억령의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 고경명과 함게 의병을 일으켰으나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과 그의 형 김덕흥을 생각했다. 그리고 옥중에 있을 때 김덕령이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을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끝물이나 있건마는
     이 몸의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끝 물 없어 하노라

춘산곡을 읊조리고 나니 목이 탔다. 문인주는 목 타는 마음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일동삼승을 무대로 찬란하게 문향을 꽃피웠던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5백년 세월이 흐른 동안, 변한 것도 많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댐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큰 길이 뚫려 자동차가 달리고,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대궐처럼 거대한 집들이 들어서는 등, 기계의 힘은 온통 세상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았다. 그렇지만 선인들이 혼을 담아 붓 끝으로 이루어놓은 아름다운 삶의 흔적들은 비록 본디 모습을 잃었어도 우리들 마음속에 오롯이 남아,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가냘픈 붓과 힘센 포크레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온 문인주는 읽다가 만 ‘소쇄원 사람들’ 이라는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자징은 충청도 석성(石城)현감으로 있을 때, 두 아들을 잃었다. 크게 상심하고 있을 때 두 아들의 스승이었던 조헌이 양자징에게 조문편지를 보내 그를 위로하였다.

<저 조헌은 아룁니다. 뜻하지 않은 화가 문득 당신의 아들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니, 이 평화로운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삼가 생각 건데, 자애로운 부모로서 애통한 마음을 어찌 감당하시는지요? .....저는 혀를 차면서 광야에서 부질없이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만 할 뿐이니, 이것은 고인이 말한 백인(佰仁)이 나로 인해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오늘에 증험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세상에 얼굴 들 것이 없습니다.....일찍이 시 한수로써 산남에서의 고통을 토로하였는데, 경경한 심사는 오래되어도 잊기 어렵습니다. 이제 삼가 기록하여 올리오니, 삼가 다 보신 후에는 한 번 탄식하시고 불살라버리셔서 뜻하지 않는 소요가 일어나지 않게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먼 길을 떠나 운수간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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