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5화

조헌은 천경과 천회의 스승이었기에 편지 내용처럼 응당 자신이 책임을 져야할 사람인데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있었다.  
문인주는 양자징의 입장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는 두 아들의 죽음보다는 상소 때문에 사단을 일으킨 아들들의 행위에 대해 더 큰 고통을 겪었으리라.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 자징이 오죽했으면 자식교육 제대로 못시킨 죄를 한탄하며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고암굴에 처박혀 지냈겠는가. 자징은 김여물이 보내온 정여립 부하와 천경. 천회의 대질심문 내용을 보고서야 비로소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 문서를 가보로 간직하라고 일렀다. 김여물이 보낸 문서에 정철의 사주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두 아들을 잃고 고향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있던 자징은 70세에 임진왜란을 당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워낙 고령인데다가 아들들을 잃은 상심이 너무 커 나서지 못했다. 그는 의병장이 된 친구 고경명과 김천일에게 편지를 보내, 국난을 앉아서 구경만하는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편지에서 “나라가 큰 난리가 있어 임금이 피신하는 치욕을 당하고 있음으로, 신하는 죽음으로 의를 떨치는 것이 마땅한데 노병으로 근왕을 못하니, 차라리 죽어 없음만 못하다.” 고 하면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자징은 아들 천운을 보내 두 의병장들과 함께하도록 하고 군량까지 보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천운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고경명 의병장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경명 장군은 두 형의 죽음으로 독자가 되어버린 천운에게 연로한 부모를 잘 봉양하라며 돌려보냈다. 

양자징은 의병에 가담하지 못한 죄책감과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고통을 달래기 위해 마을 뒤 고암굴에 들어가 은신하다가 1594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 유언대로 대대손손 소쇄원을 지킬 것과 자손들이 함부로 남의 송사에 뛰어들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양산보의 셋째 아들 양자정은 아버지 뜻을 받들어 둘째 형 자징과 함께 소쇄원을 지켰다.
자정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쇄원에서 조용히 평생을 보냈다. 자징 형님이 석성현감으로 있었고 천경 천회 두 아들이 살아있을 때인 1590년, 인근 선비들이 성산 아래 계류에서 더위를 식히며 시를 짓고 노닐었던 성산계류탁열도(星産溪流濯熱圖)를 보면 자정도 참석하고 있었다. 이 때 참석한 선비들로 김복억.김부륜.최경회.기오헌.오운.양자정.김성원.정암수.정대휴.김사로.김영휘. 임회 등이었다.
 
정여립 사건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는 동안 소쇄원은 비운의 바람에 휩쓸리게 되었다. 자징은 두 아들을 잃은 것 말고도, 장남 천경의 네 가족, 첫째 딸 부부, 둘째 딸 사위마저 왜란의 난리통에 희생당했다. 정유재란 때 양천경의 3남1녀 중에서,차남 몽린과 삼남 몽기, 그리고 장녀와 어머니 함풍이씨 등 4명은 피난을 가다 왜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몽린은 14, 몽기는 10세였다.   

문인주는 거듭된 사화와 전란 속에서 많은 비운을 겪은 둘째 양자징의 후손들에 비해 셋째 자정의 후손들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특히 그는 일부 족보에 사망연도가 1597년도라고만 기록되었을 뿐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양자정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1597년이라면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가 아닌가.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는 왜군은  순창을 거쳐 담양 창평을 휩쓸며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하거나 붙잡아가는 등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왜군들은 창암촌에 불을 질렀다. 마을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이 때 자정은 71세의 고령이었다.

문인주는 자정의 최후를 상상해보았다. 다급한 순간이긴 하지만 자정은 정신을 차려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는 30세가 된 조카 천운에게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피신을 하라고 일렀다. 장조카 천심(큰형인 양자홍의 둘째 아들)은 왜군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피난길에 올라 없었다. 조카 천운과 가족들이 한사코 자정에게 함께 피난을 떠나자고 매달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혼이 깃든 소쇄원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소쇄원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훼손하지 말라.”고 남긴 유언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71년을 살았으니 마지막 소쇄원을 지키다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가족들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고 혼자 남았다. 그는 도끼를 들고 광풍각 마루에 앉아서 왜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소쇄원에 들이닥친 왜군은 도끼를 옆에 놓고 광풍각에 앉아 있는 늙은 자정을 향해 일본도를 휘두르며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자정은 부릅뜬 눈으로 왜군들을 찔러보며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왜군은 그대로 광풍각에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검은 연기와 불길이 에워쌌다. 그는 불길 속에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왜군들은 불길 속에 파 묻혀가는 자정을 깔깔대며 구경했다. 자정은 가까스로 숨을 쉬면서 제월당에서 무섭게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월당이며 형님의 별서인 고암정사와 자신이 지은 부훤정사도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소쇄원이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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