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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86)문순태 작가

<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6화

양산보와 그 아들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 가꾸어 놓은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윤운구가 전란 후에 양천운 한테 보낸 시에 그 때의 처참한 광경을 표현하고 있다.

  명원 (名園)가에 시냇물은 무너진 돌이오
  빈 마을 사립문은 연기에 그을렸네
  새로운 그림자는 푸른 대나무에 드리워져 있고
  옛 정원 주변 소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른데
  하늘에서 이제부터 노닐어보소
  곡(曲)을 해도 대답하는 이 없으니
  항아리 기울여가며 술을 마시고
  모든 세상 근심 삭여본다네  

이 시에서 노래한 대로, 개울에 돌담이 허물어져 있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마을은 텅 빈 채, 불길에 그을려 보기 흉한 사립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훗날 양천운이 불에 타버린 광풍각 중수 상량문에 쓴 글을 보아도 그 때 소쇄원의 광경이 얼마나 황량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과연 하늘은 무슨 뜻이 있어 이리도 무참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불에 태워져 가시덩굴로 뒤덥혀 있고 흙 담은 허물어져 쑥대밭이 되었으니 책 읽고 거문고 튕기시던 곳은 온 데 간 데 없구나. 
 
 양천운이 벼슬을 얻기 위해 한양에 올라가 있다가 포기하고 다시 창암촌으로 돌아온 것은 다음해 한 여름이었다. 그는 창암촌과 소쇄원이 옴씰하게 불에 타서 폐허가 된 것을 보자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메어져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는 비통에 젖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소쇄원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흔적도 없고 불에 탄 채 죽거나 검은 연기에 그을린 나무들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천운은 먼저 할아버지의 거처였던 제월당의 젯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조부님, 죄송합니다. 조부님께서 혼신을 바쳐 일구어놓으신 소쇄원을 지키지 못한 죄를 용서해주소서.”
천운은 할아버지한테 제월당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한테도 절절한 마음으로 사죄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필코 죽기 전에 소쇄원을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할 것을 맹세 했다. 

 그는 조부님이 세상을 뜬 후, 날마다 제월당과 광풍각에 나와서 손수 비로 쓸고 걸레질을 하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렸다. 두 형님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던 날도 아버지는 종일 제월당과 광풍각 안에 들어앉아 빗자루로 쓸고 또 쓸었다. 아버지에게 제월당과 광풍각은 바로 조부님 그 자체였다. 절통한 심정으로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있는데 까마귀 두세 마리가 연기에 그을린 소나무 우듬지에 앉아서 낭자하게 울었다. 천운은 천천히 일어서서 소쇄원을 둘러보았다. 불에 타지 않고 남아있는 집이라고는 안채에 달린 행랑채뿐이었다. 그 사이 행랑채에서 노비들이 천운을 발견하고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나와 반겼다. 그들은 마을이 불에 탈 때 무등산으로 급히 몸을 피해 있다가, 석 달 후 일본군이 창평을 떠난 후에 참암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서둘러 피신을 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마을로 돌아와서 늦게나마 가을걷이를 끝내고 봄이 오자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등 농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소쇄원에 돌아온 천운은 노비들로부터 부훤당 숙부가 왜군들한테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비보를 들었다. 누이와 매부 또한 왜군한테 죽고 큰형님 댁 형수와 세 아이들이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 사실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져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는 소쇄원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은 복구하면 될 일이었지만 목숨을 잃거나 일본으로 끌려간 혈육을 생각하면 분통함과 슬픔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천운은 조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는 꼬박 사흘 동안 조부 무덤 앞에 엎드려 소쇄원을 지키지 못한 불효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는 너무도 허탈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천운은 한동안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는 종일 행랑채 골방에 들어박혀 있었다. 어떻게해서라도 소쇄원을 복구하고 싶었으나 재원을 마련할 길이 너무 막막했다. 광주 외가에라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볼까도 싶었지만, 전란을 겪은 후라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천운은 소쇄원 뒷산 옹정봉 자락에 한천정사 (寒泉精舍)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서실을 소쇄원 원림 안이 아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뒷산 호젓한 기슭을 깎고 꽃바위 위에 지었다. 소쇄원에서 꽃바위 한천정사로 가는 길은 잡목이 하늘을 가리고 가시덩굴이 뒤엉켜 걷기조차 힘든 비탈이었다. 그는 왜 이런 외딴 곳에 한천정사를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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