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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담양천년 특집(담양담양사람들)/죽녹원을 지키는 장인들(1)
  •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 승인 2018.11.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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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녹원 시가문화촌 송강정 훈장 초암 박인수

▲송강정 박인수 훈장
▲시가문화촌 송강정

“가르치면서 오히려 배웠습니다.”

죽녹원 시가문화촌 송강정에서 관광객들에게 10년째 ‘서당체험’을 통해 훈장 노릇으로 봉사중인 초암 박인수 선생을 만나보았다.

초암 박인수 훈장은 1947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외가에 예술가들이 많은데 그 탓인지 그도 유년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했다. 그저 먹의 냄새와 글과 그림이 좋았다. 아버지가 공직자라 예술을 권유하기도 했다. 진도 출신인 남농 선생의 영향 때문인지, 외가의 영향인지 아버지는 그가 먹을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해 흐뭇해 하셨다. 그는 목포 학원에서 시·서·화를 배웠지만 젊은 시절은 광주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는 낙안읍성에서 서당을 3년 정도 했고, 중·고등학교에서 20년 동안 한문, 서예, 사군자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
“강의 나가기 전에 강의를 준비해야 하잖아요? 가르치려면 공부를 그만큼 많이 해야 하니, 가르치기보다 오히려 배운 셈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가르쳤다기보다 배웠던 시간이었다.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되고, 좋아서 하는 일이라 무료로 재능을 기부하곤 했다.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 세 가지가 있어요.”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게 세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해병대를 지원한 것이었다. 5년 동안 근무하면서 월남전 때 참전도 했다. 전국에서 모인 청년들과 부대끼며 배우고 격려하며 뜨거운 동지애가 무언인지 체험했다. 팔도에서 다양한 청년들이 모였지만 텃세도 없었고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도 없었다. 그렇게 전우애를 쌓아 월남전에 투입되었다. 청룡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여한 것을 일부는 부러워하기도 했다. 예술가가 전쟁을 경험한 것이 창작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꼭 전쟁을 하고 전쟁에 참가해야 예술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예술은 아름다움만 추구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스물다섯에 제대하고 남종화의 대가이자, 남농 선생의 수제자인 아산 조방원 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전통 수묵화를 계승하여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한 조방원 선생을 제대 후 2개월 만에 찾아뵈었다. 예술가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망설임 없이 그분을 찾아뵌 것이었다. 47세의 그분은 “자연이 스승이다” 라고 강조하시곤 했다. 마음이 맑고 밝아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셨다. 의술이 좋아 시골에서 산다면 120살까지 살 수 있으니 예술가는 시골 생활이 좋다고도 하셨다. 그때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가르쳐주기를 바랐지만 말씀으로만 드넓은 우주를 이야기하시니 당시로서는 아득했다. 하지만 70이 넘어 돌이켜보니 그분 말씀에 공감이 갔다.

세 번째는 원불교에 입문한 것이었다. 맑은 바람 솔솔 불고 밝은 달 둥실 떠오를 때 내가 의문하고 걱정하고 알고자했던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도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철학에 심취하여 원불교에 신앙의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원불교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세 가지가 그에게 큰 북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한복이 편해요.”

초암 선생은 25세 때부터 한복만을 고집했다. 지금도 한복을 입고 생활한다. 한복은 동전을 매일 갈아야 한다. 그는 세탁소의 기술을 빌리지 않고 직접 동전을 간다. 몇 년 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날 예식장에 가려고 세탁소에 한복을 맡겼다. 그런데 주인이 한복에 여자 동전을 떡 하니 붙여놓은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동전을 직접 갈고 있다. 외출이 있거나 외출할 일이 없어도 매일 동전을 새로 단다.
“동전 다는 시간이 채 3분도 걸리지 않아요. 와이셔츠 다리는 데 일반인이 3분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아마도 불가능 할 걸요? 그러니 얼마나 간편하고 편합니까?”

“불의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초암 선생은 1시 반에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샤워를 한 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묵상이다. 3번 요추가 튀어나오지 않게 바른 자세로 앉아 묵상에 잠긴다. 어제는 잘 걸어왔는지, 오늘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 걸을 것인지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고,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렇게 묵상하며 항상 좌표를 설정해놓고 움직인다. 그리고 운동을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공수도를 배웠고 지금도 틈틈이 운동을 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운동을 강조하곤 했다. 운동을 하면 바른 사고를 지닐 수 있고 어떤 자리에서건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기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자신감이 없으면 눈치 보느라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해서 학생들에게 운동이 필수라고 말하곤 했다. 남을 때려 눕히는 운동이 아닌, 호연지기를 기르고 자신감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운동을 권유하곤 했다. 간혹 우산을 휘두르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어이 학생, 우산을 휘두르면 쓰나? 운동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남에게 폭력을 가하라고 운동 한 건 아니잖아? 호연지기를 기르려고 운동했을 텐데 그럼 안 되지 않겠어?

그가 치아 치료 차 보훈병원에 갔을 때였다. 참전 용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보훈병원에서 지긋한 노인들이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린 것을 보았다. 아무리 몸이 불편하더라도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선생님 꽁초 주우세요. 재떨이 저기 있잖아요? 꽁초 주우세요!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강의 차 수원역에서 내렸다. 역에는 엄청난 인파로 북적였다. 역 안은 물론 밖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20대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고는 꽁초를 도로에 휙 버렸다. 너무도 당당한 행동이었다.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 군인도 있을 것이고 경찰도 있을 터인데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도포차림에 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그가 나섰다. 어이, 젊은이! 그는 청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원래 목소리가 크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청년의 반항에 대비해 청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주우라고 다소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청년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위압적인 톤이라도 경쾌하게 말했다. 그러자 청년이 꽁초를 줍고는 미안하다고 돌아섰다.

예(禮)를 훈육하고 기념으로 부채그림 그려 관광객들에게 선물

▲부채에 삶의 교훈(글,그림)을 그려주는 송강정 훈장님

그는 호칭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다. 젊은 부부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어머니가 자식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아들, 아들’ 하고 부른 것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들의 이름을 불러서 우주의 기운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이름 대신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우주의 기운을 차단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리더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가정에서부터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나 전통이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님에도 요즘은 너무 쉽게 고귀한 전통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리의 문화 위에서 새로움을 창출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는 요즘 세태가 때로는 한심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강연을 나가면 리더로서의 자세를 강조한다. 군부대 특강을 가끔 나가는데 그 때마다 예절과 리더로서의 자세를 강조했다. 리더가 지양해할 바라든지, 리더의 말과 행동이 어때야 하는가가 주 내용이었다. 리더가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도 젊은이의 미래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밀알이 되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죽눅원에서 훈장으로 통하는 그를 찾는 이에게 예를 훈육하고 기념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 선물한다./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webmaster@d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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