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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89)문순태 작가

<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89화


“나는 다만...욕심 없이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을 꿈꾸어왔을 뿐이라오. 사람이 욕심을 갖게 되면 자성이 흐려져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 못하게 되지. 그러면 결국 남을 헤치게 되며 궁극에 가서는 마음에 독이 가득 차서 괴물로 변하지. 내가 바라는 것은 하늘과 대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태극이 꽃피는 세상이오. 다른 것은 없소.”  
“과연 그런 세상이 있을까요? ”
“마음먹기에 달렸지. 벗들과 어울려 시를 읊고 도를 말하며 자연을 즐기며 살 수 있다면 그 곳이 바로 태극이 꽃피는 세상이지.”
“아, 그렇군요. 헌데 처사님이 교유하는 많은 선비들은 모두 일류 문장가들인데 왜 처사님께서는 시를 짓지 않으셨는지요? ”
“친구들이 시를 지을 때 나는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었다오. 화초를 가꾸는 일이나 시를 짓는 것이나 결국 같은 마음 아니오?. 나무와 꽃이 다 시이지.”
“처사님께서는 인생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신지요? ”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듣고, 달 보고 꽃 보고 구름 보고, 좋은 사람 만나고 희로애락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지요.”
“다시 열다섯 살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한양으로 올라가 정암 선생 제자가 되겠는지요? ”스승님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양산보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그 때 여섯 살 난 서자 자호와 아홉 살 되는 죽은 자홍의 장자 천리가 배롱나무 그늘 밑으로 와 쪼그리고 앉았다. 천리는 세 살이나 아래인 자호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천리가 자호를 마치 동생한테 하듯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었더니, 그 후부터 깍듯하게 삼촌으로 대접했다. 비록 자호 어미가 가마를 타지 못하고 혼례도 치르지 않았지만 첩실이 아니고 후실이 분명한지라, 제대로 법도를 지키게 한 것이었다. 양산보는 아비 없이 자라는 천리가 너무 가여워서 한번 안아주고 싶었지만 자호 눈치를 보느라 그냥 애틋한 눈으로 바다보기만 했다.

 양산보는 아침부터 자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징은 그동안 순창 점암촌 하서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스승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자징도 스승의 집에서 가까운 불대산 하청사(下淸寺)에 들어갔다. 오늘 자징이 집에 돌아온다는 기별을 받았다.
“어느새 자미화가 활짝 피었네요. 꼭 고운 여인네가 고깔을 쓰고 있는 것 같어요.”
양산보가 배롱꽃에 취해 있는 사이 유 씨 부인 버들이가 수박화채를 소반에 담아 들고 제월당에 나타났다.

“무엇인가.”
“목을 축이시라고 수박화채를 만들어 왔구만요.”
버들이가 제월당 마루에 앉아 수박화채 사발을 양산보에게 내밀었다. 양산보는 사발을 받아 숟가락으로 서너 차례 떠먹고 나서 소반에 놓았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저 꽃이 질 때까지는 날마다 여기 앉아서 눈이 아프도록 바라보고만 계시겠구만요.”

버들이가 자미화를 보며 푸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궐녀는 양산보가 자미화를 보며 죽은 아씨를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버들이는 손톱만큼도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양산보는 버들이의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자미화보다 더 이쁘고, 자미화보다 더 오래오래 피는 꽃이 있남요? ”
“글세... 헌데 왜 그러는가? ”
“지 꽃으로 할라고요. 그런 꽃이 있으면 자미화 옆에 하나 심어줘요.”
그 말에 양산보가 고개를 돌려 버들이의 옆얼굴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석 달 열흘 동안 피는 꽃은 없다네.”
“자미화보다 이쁜 꽃은 많지요? 연꽃, 목단꽃, 살구꽃, 철쭉꽃....그래요, 지 꽃은 연꽃으로 해요. 앞으로는 연꽃을 봄시로 지를 생각해주셔요. 아니, 연꽃은 안 되겄네요. 연꽃도 자미화랑 같이 여름에 피어서 싫구만요.”
“자네 꽃은 이미 있지 않은가? ”
“........예? ”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깨끔한 꽃이 자네 꽃이네.”
“그것이 무슨 꽃인디요? ‘
“목화, 자네 꽃은 목화네.”

양산보는 다시 실소를 하며 버들이를 보았다. 버들이도 싫지 않은지 살포시 웃음을 머금어 날렸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만면에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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