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의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90화

자징이 나타난 것은 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자징이 젊은 선비와 함께 광풍각 아래쪽 계곡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교를 건너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버들이는 자징이 손님과 같이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일어섰다. 양산보는 자리를 뜨는 버들이와 죽교를 번갈아 보았다. 죽교가 심하게 출렁거려 두 사람은 균형을 잡아가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양산보는 그들이 죽교를 다 건너와서야 지징과 함께 온 젊은 선비가 정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정철은 소쇄원에도 자주 왔으며 그보다 나이가 많은 자징 자정 형제와 가깝게 어울렸다. 자징은 정철보다 열한 살이 많았고 자정은 일곱 살이 위였다.

“아버님, 소자 왔습니다. 마침 환벽당에서 송강을 만나 같이 왔습니다.”
양산보는 자징이 오는 것을 보고 제월당 안으로 들어가 있다가 인사를 받았다.
“자네 호가 송강이라고 했던가? ”
양산보가 송강을 짯짯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예, 환벽당 앞 여울 이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요.”
“송강이라, 좋은 호일세, 그래, 지금도 환벽당에서 공부하는가?”                
양산보가 웃는 얼굴로 정철을 보며 물었다.
“기촌 스승님이 내려오셨으니 이제 면앙정에서 공부를 할까 합니다.”
“송강은 예전에도 면앙정 문도가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송강은 점암촌에서도 소자와 같이 있었습니다.”
자징의 말에 양산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강은 그동안 김윤제, 김인후, 송순, 임억령,기대승 등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 네 스승 하서는 고향에서 어찌 지내더냐? ”
양산보가 아들 자징에게 김인후의 안부를 물었다.
“강령하십니다요. 오늘 아침 들렀을 때는 점암촌에서 제자들과 같이 노닐었던 대학암 말씀을 하시더이다.”

대학암(大學巖)이란 순창 점암촌 훈몽재 초정 앞에 있는 널따란 바위이다. 하서는 점암촌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주로 대학을 강했는데, 그 때 제자들과 함께 노닐었던 바위를 대학암이라고 했다.
“네가 소쇄원으로 돌아오게 되어 하서가 이번에도 몸씨 서운해 했겠구나.”
양산보는 자징이 점암촌에 있을 때, 부모를 뵈러 창암촌으로 떠나자, 너무 허전해서 술항아리를 모두 비울 정도로 취했다는 이야기를 하서한테서 들은 바가 있어 그렇게 말했다. 하서는 양자징과 조희문 두 사위를 아들처럼 지극히 사랑했다. 하서는 특별히 자징을 사랑하여 점암촌에 있을 때 그가 아끼던 단주(端州) 영양 (羚羊)에서 나온 돌로 만든 명품 벼루를 선물하기도 했다. 따듯하여 먹이 흘러내리지 않고 매끄러워서 먹이 엉키지 않는다는 단주석 벼루를 일컬어 ‘ 푸른 물의 뼈, 자줏빛 구름의 뿌리, 구슬처럼 매끄럽고, 옥처럼 따뜻하다’ (碧水之骨 紫雲之根 如珠之潤 如玉之溫)고 했다.

“오는 길에 고봉도 만나서 칠석날 모임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봉 기대승은 자정과 동갑으로 서로 가깝게 지내는 처지였다.
“면앙정에도 미리 알려드려야지요.”
“조금 전에 자정을 보냈다. 오는 길에 석천도 뵙고 오라고 일렀느니라.”
“ 허면 이제 얼추 기별을 다 한 것 같습니다. 송강이 고 진사한테도 서찰을 보냈답니다.”
고 진사라면 제봉 고경명을 말함이다. 제봉은 그해에 진사가 되었다.
“송천한테는 어찌했느냐.”
“사흘 전에 인편을 보냈습니다. 헌데 지금은 한양에 계실 것 같지 않습니까? ”
“교지를 받았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양학포의 아들 송천 양응정은 그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무렵 양자징. 양자정 형제는 아버지 양산보의 50회 생신을 맞아 소쇄원과 인연을 맺은 선비들을 모아 벽송음(碧松飮)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여름 더위에 푸른 소나무 그늘 아래서 술을 마시며 담소나 즐기자는 것이었다. 선비들은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을 완상하며 술을 마시고 담소하며 시회 열기를 좋아했다. 봄에는 살구꽃을 구경하며 술을 마시는 홍도연 (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장미음 (薔薇飮), 한여름에는 벽송음, 가을에는 국화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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