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꿈, 소쇄원의 그림자> 제93화

평상바위 아래로 가산이 있고 모란 작약 등 여러 가지 화초가 심어졌다. 또한 계곡의 동쪽 두 개의 길쭉한 연못에는 희고 붉은 연꽃이 가득 피어 은은한 향기를 품어내고 ,연못과 연못 사이에 물레방아가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다.    
 송순 일행은 조심스럽게 개울 쪽으로 내려갔다. 일행이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선비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 때 김윤제가 헐근거리며 뒤따라 당도했다.
“이제 오실 분들은 얼추 다 오신 것 같습니다.”
“송천은 못 오는 모양이구나.”

자정과 자징이 주고받는 말에 양산보는 못내 서운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양응정은 아마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사이 선비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송순, 김윤제, 양산보, 임억령, 김인후 등은 평상바위에 자리를 잡았고 걸상바위에는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등 젊은 선비들이 둘러앉았다. 그 밖에 창평 근동의 젊은 선비들은 물가에 깔아놓은 멍석에 자리를 잡았으며, 거문고, 대금, 장고, 해금 등 네 명의 악공들은 거문고 바위에 앉도록 했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영산회상은 거문고,가야금,세피리,대금,장고,해금 등 여섯 악기가 기본인데, 이날은 거문고와 대금,장고와 해금만으로 맞췄다. 모두 좌정을 하자 악공들이 영산회상 연주를 시작했다. 대금과 해금이 영산회상 중 상령산과 중령산으로 시작을 알리자 거문고가 타령으로 이어받으면서 느리고 건드렁대는 소리가 소쇄원에 가득 울렸다.
 그 사이에 술과 안주가 나왔다. 권커니 잣거니 행주가 시작되자 자징이 일어서서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오늘 이렇게 스승님들과 벗들, 그리고 후학 여러분들을 소쇄원에 초대한 것은 가까운 선비들끼리 술이나 마시면서, 잠시 더위를 식히자는 저와 아우 자정의 생각이었습니다. 마침 오늘이 말복에다 칠석이고, 사흘 후면 가친께서 쉰 번째 생신을 맞는 날입니다. 애초에는 시회를 열까도 했으나, 저의 장인이시며 스승님이신 하서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 지으신 소쇄원 사십팔영을 시음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가친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해서 먼저 소쇄원 사십팔영 시음을 하고, 시회는 주찬 후에 열기로 하겠습니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으나 소쇄원에서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지징의 인사말이 끝나자 김인후가 일어섰다.
“먼저 우리 소쇄처사 언진 형님의 오십 회 생신을 심축합니다. 언진 형님으로부터 졸작 소쇄원 사십팔영 시음회를 갖고 싶다는 서찰을 받고 잠시 저어되어 사양하였으나, 사위 자징의 간청에 못이겨 승낙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마침 이 자리에는 올해로 고희를 맞으신 제 스승 면앙정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여 먼저 면앙정 선생님께서 시문을 열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김인후가 송순 앞으로 나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송순은 사양하지 않고 일어서서 선비들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날 송순은 얼 마 전 소쇄원에 들렀을 때 지었다면서 ‘ 외제 양언진 소쇄정’이라는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작은 집 영롱하게 지어져 있어
앉아보니 숨어 살 마음이 생긴다
연못 물고기는 대나무 그늘에 노닐고
사랑스런 돌길을 바삐 돌아 걸으며
가련한 매화 보고 나도 몰래 한숨짓네
숨어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기에
날지 않은 새집을 들여다보네
   
송순이 시를 읊고 앉자 거문고, 대금, 해금, 장고가 일제히 소리를 내어 흥취를 돋우었다.
순서에 따라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시음이 1영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정자 난간에 기대어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듯 물소리 들리네             
     
1영이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악공들이 악기로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내어 화답했다.

시냇가 글방에서

 창 밝으니 방안의 첨축들 한결 깨끗하고
 맑은 수석에는 책들이 비쳐보이네
 정신들여 생각하고 마음대로 기거하니
 오묘한 계합 천지 조화의 작용이라네
          
마흔세 살 김인후의 목소리는 대숲바람처럼 청청하게 울렸고, 1영, 2영, 시음이 끝날 때마다 흥을 돋우는 악기소리는 물소리와 바람에 실려 소쇄원 안통에 가득 넘쳐흘렀다. 제 8영 ‘물보라 일으키는 물방아’를 읊는 사이, 양산보는 조용히 일어나 혼자 광풍각 돌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돌을 쌓고 나무를 심고 전각을 지으면서 보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원림 꾸미는 일은 그에게 도피였고 집착이었으며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절망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참으로 외롭게 오랫동안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해왔던 것 같다. 잠시도 그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영광스럽게 세상에 나가고 싶은 유혹이나 충동을 느낄 때마다, 그는 자신을 사람이 아닌, 한 그루의 나무나 바위, 혹은 잠시 피었다가 지는 화초로 치부하곤 했다. 가까운 벗이나 후학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하고 시를 지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을 볼 때마다, 양산보의 마음은 한없이 외롭고 슬펐다. 마음이 위축될수록 소쇄원 꾸미는데 더욱 욕심을 부리고 집착했다. 그것이 과연 잘 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회한은 없었다. 평생 세상과 벽을 쌓고 나무처럼 돌처럼 살아온 그를 정암 스승님은 어찌 생각할지가 궁금했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