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꿈, 소쇄원의 그림자> 마지막회

양산보는 광풍각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 다시 제월당으로 올라갔다. 돌담을 끼고 도는데 잠시 현기증이 일면서 다리가 휘청했다. 김인후의 목소리와 악공들의 악기 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올 봄부터 그의 기력이 자꾸만 쇠진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제월당 마루에 한참동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오곡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곡문 돌다리를 건너는데 자징이 급히 뛰어왔다.

“아버님, 혼자 어디 가십니까요.”
자징은 손님들을 제쳐두고 혼자 거닐고 있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급히 따라 나온 것이었다.
“아니다. 그냥 바람이 쐬고 싶어서....내 걱정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양산보는 거칠게 손사래를 치며 아들을 돌려보냈다. 그는 자징이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애양단 앞을 지나 대봉대에 걸터앉았다. 대봉대에 앉아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 사이로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하서가 부채를 들고 서서 계곡을 휘둘러보며 시음하는 모습이며,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하서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기촌 형님,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술을 홀짝거리는 김성원와 임억령이 보였다. 양산보는 널따란 잎으로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담뿍 받고도 푸름을 자랑스럽게 지탱하고 있는 오동나무를 보았다. 그는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난 밑동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올려 하늘로 뻗은 우듬지를 쳐다보았다. 오동나무 가지에서 참매미가 자지러지듯 울었다. 

“여기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
언제 왔는지 처남 김윤제가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아니, 사촌께서는 시음장에 계시지 않고...”
“오늘은 친구인 자네가 부럽네. 하서의 소쇄원 사십팔영을 듣다보니, 그동안 내가 벼슬아치로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고, 선비 노릇한답시고 되지도 않은 시를 짓는다고 했지만, 자네가 꾸며놓은 이 원림에 비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 같네. 한 때 자네한테 과장에 나가보라고 한사코 강권했던 것 미안하게 생각하네.”
“사촌도 참, 나야 말로 사촌에 비하면 너무도 부끄럽다네. 그동안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이 허송세월했지. 원림의 나무와 화초는 저절로 자랐고 전각들은 사촌과 기촌 형님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양산보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진심으로 처남인 김윤제와 외종형인 송순 두 사람에게 은혜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돈이면서 친형제처럼 정이 두터운 김인후에게도 고마움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이야 말로 양산보에게 달과 별 같은 존재로 어두운 삶에서 길을 밝혀준 은인들이었다.
“자, 그만 내려가세. 주인이 없으면 안 되지.”
“조금만, 조금만.... 더 여기 있고 싶네.”
“혼자 여기서 은밀하게 봉황을 기다리려고? 자네는 아직도 봉황이 날아올 거라고 기대하는가?”
“오겠지. 꼭 오리라고 믿고 기다리겠네.”

양산보의 단호하면서도 강하게 믿음이 실린 그 말에 김윤제는 잠시 무연해지고 말았다. 양산보는 김윤제를 의식하지 않고 오동나무 우듬지 위, 한여름 햇살이 뜨겁게 쏟아지는 하늘 멀리 시선을 던졌다. 동쪽 하늘 무등산 쪽에서 뭉게구름 한 무더기가 뭉얼뭉얼 피어오르더니 소쇄원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 양산보는 다시 현기증이 덮쳐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몸이 목화꽃처럼 가벼워지면서 양쪽 어깻죽지에서 날개라도 솟아난 듯 훨훨 하늘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문인주는 꿈속에서 대봉대 앞 오동나무에 영락없는 사람 얼굴에 황금빛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 한마리가 육중하게 날개를 접고 가지에 내려앉은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새는 대봉대 앞 땅 위로 사뿐히 내려왔다. 그 순간 황금빛 날개가 폭 넓은 흰 도포자락으로 변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문인주는 너무도 놀라 양산보를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대봉대에 눈을 감고 앉아있던 양산보가 한 마리 봉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문인주는 기급하여 처사님, 소쇄처사님, 하고 손을 휘저으며 외쳐댔다.   
그 때 휴대폰에서 휘모리 가락 거문고 소리가 울렸다.

“아빠, 저 지금 고속버스 타고 내려가요. 소쇄원으로 가면 되죠? ”
낮잠에서 깬 문인주가 혼몽해진 의식으로 휴대폰을 귀에 대자 딸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딸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확인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때 최 선생이 잃어버린 진주와 함께 바쁜 걸음으로 소쇄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문인주는 모든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눈을 감은 채 꿈꾸듯 앉아 있었다.<끝>

(그동안 문순태 작가님의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를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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