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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천년 특별기획Ⅱ/담양의 인물(2)-석헌 류옥담양의 인물(2)/ 역사인물- 담양이 낳은 조선의 위대한 선비 ‘석헌 류옥’

창평 유곡리 ‘와송당’ 에 유적 남겨.....
‘선비정신’ 실천으로 士林의식의 모체로 자리매김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I' ‘담양의 역사인물-조선의 선비 ‘석헌 류옥’‘을 게재합니다.
<담양의 인물> 편에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담양 지역사회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담양의 인물을 발굴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석헌 류옥(石軒 柳沃 1487∼1519)은 담양 창평출신으로 중종 2년 21세때 과거에 장원급제,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는 무안현감, 함경도 고령첨사, 종성부사 등을 지냈다.
석헌은 성종 18년(1497년) 창평 유곡리에서 태어나 중종 14년(1519년) 기묘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해 3월 33세를 일기로 돌아갔다.

조선 세조때의 사육신 류성원이 석헌 선생의 재종조부이며, 선조때의 송강 정철은 석헌 류옥의 손녀사위 이다. 송강 정철이 담양에 내려와 사촌 김윤제의 문하생으로 사사하면서 김윤제의 주선과 보살핌으로 그의 외손녀(류강항의 딸)와 혼례를 치르게 되는 바, 석헌 류옥 과 사촌 김윤제는 곧 사돈 간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선비 석헌 류옥은 청렴한 정치를 펴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가는 곳 마다 추앙을 받았다. 
조정에 있을때는 한전제(限田制)와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으며 외직으로 나가서는 관리들의 횡포를 막고 올바른 기강을 세웠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동국여지승람』등 여러 곳에 기록이 전한다.
석헌의 유집(遺集)과 실적(實跡)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으나 그 현손이 여러 현인들의 문집 가운데 류옥선생과 관련된 남겨진 글을 수집해 겨우 한권을 만들어 문중에 소장하고 있다.

석헌 류옥의 관향은 문화 류씨이다.
석헌 류옥의 조상은 본래 서울의 양반 집안으로서 대대로 벼슬을 누렸던 명문가였다.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100대의 수레에 군량미를 보내 왕건을 도왔던 공로로 삼한공신에 올랐던 인물이다. 문화류씨는 그 조상들이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에서 대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후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류형원 등이 문화류씨 이다.

석헌 류옥은 이 문화류씨 시조의 18세 손이다. 선생의 증조부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류인흡으로 곧 선생의 할아버지이다. 선생의 할아버지 류인흡은 조선조 사육신으로 유명한 류성원과 6촌 사이였다. 이런 사실로 류성원이 단종복위사건으로 죽게 되자, 그 화가 류인흡에게 미쳐 그로인해 역적으로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남몰래 황급히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이 바로 순창이었다. 류인흡의 큰 아들이 류문표로 그가 곧 석헌 류옥 선생의 아버지 이다. 선생의 아버지 류문표는 순창에서 창평 유곡으로 이사 와 유곡리에 정착함으로써 문화류씨가 창평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 석헌 류옥의 사당 '서륜재'
* 석헌 류옥이 태어난 창평 유곡(해곡리) 마을 전경

  석헌이 태어날 즈음 집안의 뜰에는 붉은 낙락장송이 있었는데, 그 소나무는 기이하게도 옆으로 자라 와송(臥松)이라 부르고 그 집을 와송당(臥松堂)이라 했다. 이 와송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집안을 지키고 있었다 한다.
석헌은 지조가 강하고 불의를 싫어하는 가풍을 이어온 훌륭한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마음씨가 곧고 정의감이 깊었다.
어려서 공부를 시작하자 배우면 배운대로 외우고 그대로 글을 지어 여덟살 때 이미 한문의 모든 문체의 글을 줄줄 써내려가 ‘신동’ 이라는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한다.

연산 원년(1495년) 선생이 9살 때 광한전부(廣寒殿賦)라는 글을 지었는 바, 9살의 나이로 시문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부(賦)를 짓고 문장을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14세때 옥과의 ‘영귀정(永歸亭)’ 의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당시 옥과 현감 최형한이 ‘영귀정’ 이라는 정자를 짓고 낙성하였는 바, 현감이 14살에 불과한 선생에게 기문을 청하자 그 자리에서 즉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영귀’ 란 천지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어 노래하면서 돌아온다는 뜻으로 공자의 언행을 적은 ‘논어’ 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를통해 한 고을의 현감이 14살의 소년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할 만큼 석헌은 어린 시절에 이미 학문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그 명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석헌 류옥은  1507년(중종2년) 21세때 과거에 장원급제, 관직에 나가게 된다.
첫 관직은 임금이 참석하는 경연장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취사선택, 기록하는 검토관의 직책으로 정6품의 벼슬이었다.
석헌이 조정에 들어가 경연에 참가할 당시에는 임금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벼슬아치의 비행을 고발하는 간관의 말을 잘 듣지도 않았고 경연도 자주 빠뜨리는 일이 많았다.
석헌은 이에 먼저 임금에게 “대간이라는 직책은 조정의 잘못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은 곳인데 임금이 함부로 대하면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석헌은 갓 스무살 나이에 조정에 등장해 임금을 훈계하고 어진 군주가 되도록 이끌었을 뿐 아니라 조정의 대신들 또한 그 지위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조그마한 일에도 그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다.
석헌의 이같은 강직함은 젊은 사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나 반면, 원로 훈구대신들에게는 정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헌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념으로 신하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아 나갔다.

한편, 석헌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할 만큼 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바, 사헌부와 홍문관, 사간원 등 주요 관직을 모두 거치면서 언젠가는 고향 근처의 외직을 소원하던 중 비로소 29세 되던 해 무안현감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때에 이르러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과 더불어 중종의 초비(初妃) 인 신씨복위 및 반정공신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을 죄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무안현감 재임시 중종반정 당시에 반정군들이 몰아낸 중종의 조강지처인 왕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바. 이 사건은 중종때의 사림정신을 높이는 계기가 된 반면 역설적으로 얼마후 죄없는 많은 사림들이 희생되는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그 상소가 바로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로 이는 조선의 역사에서 남녀, 부부, 군신의 의리를 높이는 큰 가르침이 되었다.

석헌 등이 올린 상소는 후대 기묘사화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이는 결국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됐고, 백성을 위한 정치는 중종때의 도학정치를 발흥하는 출발점이 됐으며, 석헌이 소중하게 여겼던 의리정신은 조선조의 정신적 이상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조선조 선비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던 인물, 바로 그가 담양이 낳은 석헌 류옥이다.
석헌은 당대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를 의리의 역사로 흘러가게 하고 선비로서 지켜야 할 사명과 신념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 장광호 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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