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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담양의 5.18, 그날의 기록

광주항쟁 기간중 담양에서 있었던 일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이해섭의 담양이야기’에 수록

5.18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본지는 ‘담양에서의 5.18’은 당시 어떠했는지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에 본지는 지난달 29∼30일 이틀에 걸쳐 한국언론재단 광주지사에서 실시한 ‘5.18역사 바로보기’ 언론인 연수교육에 참여했으며 이와함께 ‘담양의 5.18’ 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위해 지난 2007년 담양향토문화연구회가 발행한 ‘이해섭의 담양이야기’에 수록된 80년 당시 담양의 5.18 목격담과 증언기록을 살펴보고 이중 광주항쟁 기간중 담양에서 있었던 일들은 날짜별로 주요내용만 간추려 보았다. 따라서 내용은 당시 필자인 이해섭 님의 1인칭 서술이며 다만 소개된 내용중 일부 문장은 생략하고 오,탈자는 수정했다./ 장광호 편집국장   

● 5월 18일
광주는 통행금지 시간이 저녁9시로 앞당겨 실시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대인동 종합버스터미널에 이어 서방버스정류장도 담양행 버스가 모두 운행을 정지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담양사람 3명과 담양까지 무조건 걸어가기로 하고 바쁜 걸음으로 걷다보니 망월동에 이르렀다. 검문소에서 경찰관의 검문검색이 끝나자 한 트럭이 담양으로 간다고 해서 운전수에게 사정해 겨우 얻어타고 담양읍에 들어왔다. 이미 담양에도 통행금지 시간이 단축됐고 읍내는 고요히 잠이 들었다.

이날 밤 담양경찰서에서는 극비리에 은익작전이 벌어졌다.
경찰서장 지휘하에 기밀문서와 무기대장(장부)는 물론 경무과·수사과·정보과 일부 서류가 담양경찰서 뒷집인 담양군교육장 관사와 그 옆집(필자의 집) 등에 몰래 숨겨졌다. 이밖에도 총기류의 실탄 박스와 카빈총, 권총 등이 교육장 관사와 필자의 집에 은닉됐다. 중기관총과 M1총은 월산면 모처에 숨겨졌다는 어느 경찰관의 귀띔이었다.

● 5월 19일
담양은 광주,서울 전국에 걸쳐 모든 전화가 끊겼다.
정상적인 도로는 차량 통행이 어려워 농로길, 밭길 등으로 다녀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미 담양에도 거센 데모바람이 불고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모두 날조된 허위임이 밝혀지고 부녀자 및 여학생의 가슴을 잔인하게 찔렀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담양의 부녀자들의 격분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 5월 20일
오전 9시 30분경 약간의 비가 내렸다.
난데없는 천둥소리에 놀라 경찰서쪽을 바라보니 군용트럭이 담양경찰서 본관 입구 현관에 돌진한 것이었다. 시민,학생들이 몰고 온 군용트럭 이었다. 20여명의 시민군이 머리띠에 곤봉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다.
담양읍 십자로(현.중앙로 사거리)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로 수천명이 모여들어 박수와 만세를 부르며 여기저기에서 음료수와 빵을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모두가 자발적이고 아낌없는 각종 식료품이 쏟아져 나왔다.
담양 부녀자들의 정의감이 폭발, 목이 터져라 외쳤고 끝내는 부녀자 수십명이 울음을 터트렸다. 급기야는 시민군과 부녀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또는 부등켜 안고 대성통곡 했다.
“지금 광주에서는 학생과 시민군이 죽어가고 있으며 심지어 부녀자들까지도 희생되고 있습니다”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날 오후2시경, 학생과 시민군이 몰고 온 버스에는 붉은 글씨로 ‘전두환 타도’ 의 대형 현수막이 버스 양쪽에 걸려있었다. 처음보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시민군의 스피카에서 계속 흘러나온 전두환! 가지각색의 규탄구호였다. 민간인이냐? 군인이냐? 모두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어서 수십명이 탄 군용트럭이 광주쪽에서 담양읍 중심에 자리한 중앙파출소에 돌진하였다. 그러나 크게 부서지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전두환의 정체가 확성기를 통해 밝혀졌다.
오후에 광주쪽에서 시체 2구를 운구한 것을 목격한 시민은 최고조에 달한 격분 끝에 시민군에 가담했다. 전날 문화방송이 불에 타고 시외전화가 두절되자 광주에서 기숙하는 많은 학생들의 가족과 가정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광주방송국(KBS) 건물과 세무서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할때마다 담양 군민의 걱정은 더욱 심화됐다.

당시 담양경찰서는 2∼3명의 감시원만 남기고 전원 광주로 출동중이었다.
경찰서에 남아있던 2∼3명의 사복경찰은 모두가 혼비백산 도망가고 없었다. 이날 12시경에는 모두 철수하고 조용했다. 20일 새벽에 담양경찰 1개 중대는 극비리에 담양을 출발, 광주로 트럭을 몰아 방석모와 경찰봉만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부근에 배치되었다. 광주에 출동한 담양경찰 부대는 가급적 시민군과의 충돌을 피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시시각각 변했다.
한편 서울에 자식과 가족을 둔 가정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전화가 두절되고 방송이 중단되어 외부소식을 알수 없어 애타는 부모와 가족들은 인접 순창읍에서는 서울 통화가 가능하다는 말에 10여명이 택시로 달려가 다방 등지에서 통화를 했다.

● 5월 21일
화창한 신록의 계절이다.
담양경찰서 후정에는 무기고가 있고 경찰서장 관사에는 기밀서류와 각종 총기, 그리고 많은 실탄이 피난(?)... 허술한 비장상태로 가마니와 시멘포대로 덮어 숨겨 있었다. 불과 20M 가까운 곳에 시민군들이 경찰서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이때 군용헬기가 담양읍 상공을 선회한 후 무등산쪽으로 사라졌다. 시민군 한 사람이 출발할 것을 권하자 즉시 상차하면서 애국가를 합창하며 장성쪽으로 이동했다.

● 5월 22일
봉산면 기곡리 송산마을 아홉바위 도로변에 군용트럭 한 대가 누워 있었다. 엔진고장으로 시민군이 버리고 간 것 같았다. 거기에는 ‘살인마 전두환’ 이라 쓰여진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 5월 23일
광주 전남도청 인근에 배치된 담양경찰 부대는 시민군과 학생 데모대와 마주쳤다. 뜻하지 않는 충돌이 벌어졌다. 심한 몸싸움이 계속되고 부상자는 속출했다. 담양경찰은 4∼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혼란속에 담양경찰 총책임자인 서장도 행방불명 됐으나 다음날 담양으로 돌아왔고 대원들도 무등산길을 따라 원효사를 거쳐 담양군 남면으로 빠져 모두 경찰서에 귀대했다. 담양경찰이 광주에 출동중 경찰서의 일,숙직을 담당한 직원 4∼5명이 밤낮으로 근무했으나 사실상 이들은 경찰서 부근의 사랑방에 매일같이 피신하는 촌극이 되풀이 되었다. 그 이유는 어디서 시민군이 기습적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런데 당시 서내 근무자는 모두가 고령자였고 시민군이나 학생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주에서의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는 80년 가을에 접어들자 관련된 주동자,선동자,동조자 색출이 극비리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에앞서 보안대와 또다른 정보기관이 상주하여 첩자를 이용한 정보수집 등이 있었고 끝내는 이들의 횡포가 각 행정기관 등에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여겨졌다. 
한편 본지가 소개하는 ‘이해섭의 담양이야기’ <제8장 5.18과 潭陽> 편에는 광주항쟁 당시 희생된 담양출신 사망자를 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중 금성면 출신 1명, 남면출신 2명, 대덕면 출신 3명, 대전면 출신 1명, 무정면 출신 1명 등이다. (참고 : 이 글은 담양향토문화연구회 발행 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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