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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담양의 인물(2) 애국지사 김제중(金濟中)

면 공무원 신분으로 3.1만세운동 가담
군자금 모금, 임시정부 지원에 큰 역할

▲애국지사 김제중 기념비(대덕면 장산리)

애국지사 김제중(金濟中, 1893-1950)은 담양군 대덕면 출신으로 공무원 신분이면서도 독립운동에 몸 바쳐온 독립투사이다.

김제중 애국지사의 호(號)는 소산(小山)으로,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 백부로 부터 한학과 나라사랑 그리고 예의범절 등을 수학했다. 젊은 시절, 그는 담양군 대덕면 사무소에서 6년간 공복으로 근무하면서 나라없는 설움과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통탄하면서 김성현(金聖炫), 이운경(李雲景), 정개포, 오장근(吳章根) 등과 함께 각 마을을 돌면서 면민에게 애국심을 주입시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사상적인 계도에 전념했다. 

기미(己未, 1919년) 3.1독립만세사건에 직접 가담했으며 서울로 올라가 경기·강원·충청·전라·경상 5도 대표로 구성된 독립만세 봉기 선동, 공작대의 일원으로 각 지방을 암암리에 순회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백성이 적극적인 참여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데 모두가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3.1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메아리 쳐 조선민족의 투철한 독립정신과 애국애족의 드높은 민족적 기상을 과시했다.

김제중 독립투사는 중앙무대 활동이 인정되어 1920년 3월경 대동단(大同團) 신덕영(申德永) 선생의 군자금 모금을 위해 전라도에 내려와 광주시 부동정(不動町=현.불로동) 박운아 하숙옥에 군자금 모금본부를 설치으며 김성현, 문동길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고, 광주와 담양,곡성의 부호(富豪)들로 부터 많은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헌납하고 중단없는 군자금 모금을 밤낮없이 계속했다.

그러나 일제(日帝) 관헌의 철저한 감시와 미행 등은 이들의 활동에 큰 장애가 되었고 특히 같은 민족이면서도 일제의 지령에 따른 밀정 때문에 활동의 어려움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굴하지 않은 강한 투지력과 불타는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기어이 성취하겠다는 독립정신으로 밤중을 이용, 이곳 저곳에서 모금한 현금 약속증서가 액면 4천5백엔(円), 그리고 현금 2백엔(円)에 달했다. 이밖에도 녹용, 인삼 등을 모집해 헌납하려는 순간, 밀정의 제보로 인해 1921년 왜경에 체포됐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왜경간부들의 혹독한 고문도 극복하면서 헌납자나 배후인사들을 끝내 모른다고 일관했으며 현금이나 현물은 모두 훔친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리하여 김제중, 김성현은 징역 10년을, 문동길(文東吉)은 8년을 언도받고 경상북도 대구 감옥에서 복역했고 이운경(李雲景), 정개보(丁介甫), 오장근(吳章根) 등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타지로 피신해 투옥을 모면했다.

신덕영(申德永) 선생은 김제중 투사가 자백을 안했던 관계로 계속해서 조직을 다시 정비, 강화하며 독립운동 자금모금에 더욱 분발, 임무수행에 차질없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20년 12월경 밀정들의 제보로 인해 발각돼 전원이 체포되었으며 1921년 5월에 최하 5년에서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김제중(金濟中) 독립투사는 후일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애국지사 훈장을 받았으며 수훈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추서(建國褒章追敍), 1984년 국비 90만원으로 묘비 건립,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한편 광복 46주년을 맞아 1991년 8월 15일 김제중 애국지사의 태생지이며 고향인 대덕면 장산리 장산마을에서 ‘의사(義士) 소산 김公 제중’ 독립운동 공훈기념비 제막이 있었다.
(참고 : 이 글은 담양향토문화연구회 발행 책자에 수록된 것이므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 확인된 내용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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