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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14)문순태 작가

<두 번째 꿈, 봉황을 기다리다>

“이 사람아, 목이 아프도록 불렀구만. ”
양산보가 숨을 헐근거리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인가?”
“아까는 내가 잠시 망상에 젖어 있었다네. 정오가 다 되었는데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점심이나 먹세.”
양산보가 웃는 얼굴로 바짝 다가서서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사정하듯 말하자 김윤제도 따라 희미하게 웃었다. 그곳에서는 창암촌보다는 김윤제 집이 더 가까웠다.
“망상이라니....”
“괴색스럽게도 잠시 내가 전신민 장군의 처지가 되어보았다네.”
“그래서? 전신민 장군 처지가 되어보니 심기가 어떻던가?”
“마음이 편안했네.”
“그래? 허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 언진은 편안하지 않은가? ”
“사천을 만나니 좋으이. 아주 평정심이 되었네.”
“허면 되었네.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세. 이제 자네 집보다는 우리 집이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면서 김윤제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양산보는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김윤제가 뒤를 돌아보며 재촉을 해서야 미적거리며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서너 걸음 사이를 두고 석저촌으로 들어섰다. 양산보는 그동안 성안, 혹은 돌밑 마을이라 부르는 석저촌에 수없이 들락거렸으나 이날따라 유별나게 마을이 크고 포실해보였다. 겨우 열 집에 불과한 창암촌에 비해 석저촌은 백여 호쯤 되어보였으며 반듯한 기와집도 여러 채였다.

김윤제는 그의 집 앞에 당도하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양산보를 기다렸다가 나란히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춘부장 계시는가? 인사부터 올려야겠네.”
양산보의 말에 김윤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채 쪽으로 향했다. 김윤제의 아버지 김후는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호조좌랑과 현감을 지내고 지금은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아버님, 창암촌 양산보가 아버님께 문안인사 여쭙고자 한답니다.”
김윤제가 사랑채 댓돌에 서서 통기를 하자 덧문이 열리면서 김윤제의 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윤제와 양산보가 마루로 올라서서 안으로 들어섰다.
“창암공께서도 강녕하시고? 서로 이웃에 살면서도 춘부장 뵌 지도 오래되었구만. 그래, 스승을 잃은 상심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 암, 스승을 잃었으니 한 삼년은 자중을 해야지. 그나저나 한양에 올라가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으니 문리가 많이 터졌겠구나. 네가 아는 바를 우리 윤제한테도 많은 가르침을 주거라.”

김후는 인사를 올리고 앉은 양산보의 얼굴을 한참 되작거려 살펴보며 말했다.    
“정암 선생 장례 후로 비통에 젖어있는 것을 바람이나 쐬자고 데려왔습니다요.”
옆에 있던 김윤제가 덧붙였다.
“오늘 다시 보니, 창암공이 참으로 옥골선풍의 자제를 두었구만. 풍채는 말 할 것 없고 영민하고 마음이 맑은 사람이니 앞으로 좋은 세상 만날 것이야.”
김후는 매우 흡족한 얼굴로 양산보를 뚫어지게 보았다. 잠시 후 김후는 두 사람이 사랑에서 밥상을 받으라고 이르며 밖으로 나갔다. 이내 밥상이 나와 두 친구는 겸상으로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밥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김윤제의 누이동생이 숭늉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윤덕이 네가 어쩐 일이냐? ”

김윤제가 누이를 보고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하녀를 제쳐두고 누이가 숭늉 그릇을 들고 온 것은 필시 아버지가 그리 시킨 것이라 짐작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윤제는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배시시 웃었다. 매부로 양산보라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윤제가 생각하기에 양산보는 부러울 정도로 신언서판을 두루 갖춘 데다, 심지가 굳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양산보는 그동안 윤덕이가 어엿한 처자의 자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얄캉하게 큰 키에 얼굴이 박꽃처럼 희고 눈이 서글서글했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윤덕은 얼핏 양산보와 눈길이 마주치자 소스라치듯 놀라며 숭늉그릇을 놓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허허, 저 아이가 언진과 내외를 하는구만. 하기야 이제 열다섯 살이니 그럴 때가 되었지.”
김윤제의 말에 양산보는 잠자코 있었다.
김윤제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창암촌으로 돌아오던 양산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까지 오는 동안 내내 윤덕이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서 물너울처럼 출렁거렸다. 그가 한양에 올라가기 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에 찾아갔을 때마다 얼핏얼핏 보았던 윤덕은 그저 귀엽고 연약한 여자아이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대하니 봄날 아침 이슬 머금고 활짝 피어나는 국화처럼 화사하고 향기롭기까지 했다.

 양산보는 창암촌 수박등을 올라가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물 건너 석저촌 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어 날렸다. 스승의 장례를 치른 후 처음으로 떠올려본 미소였다. 집에 들어서자 친구 따라 바깥출입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기 위해 부모가 마루에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출입을 했느냐? 어디를 갔다 오는 게냐? 점심은 먹었느냐? ”
“석저촌 윤제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는 길입니다.”
양산보는 아버지 다급한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사어른 계시더냐? ”
“예.”
“허면, 그 댁 큰 따님도 만나보았느냐.”
“예? ”
“그래? 실은 얼마 전 진사 댁에 은밀히 네 혼담을 넣었느니라.”
“예? ”
양산보는 너무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 아버지를 보았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 친구가 그를 찾아온 것이 혼담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윤제는 혼담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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