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대 바람 소리(6화)

 어머니는 벤치에 앉아서도 숲의 위 아래쪽을 연신 번갈아보았다. 한 시간쯤 관방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다리를 건너 바쁘게 죽녹원으로 올라갔다. 정애가 멀찍이 뒤를 따라갔다. 대 바람 소리가 소소하게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땀 흘리고 나서 사워를 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대 바람 소리가 핏줄 속으로 스며들어온 느낌이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서 숨소리가 낮아졌다. 담양에 내려온 후 날마다 대숲을 보며  살고 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대나무 숲 속에 이르자 생기를 되찾은 듯 어머니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비척거리지도 않고 대나무처럼 꼿꼿하다. 어머니는 쉬엄쉬엄 ‘운수대통 길’을 올라가다, 샛길을 지나, 왕대 숲이 우거진 ‘사랑이 변치 않은 길’의 인공폭포 아래서 잠시 숨을 돌리는 것 같더니, 다시 ‘죽마고우 길’에서, ‘추억의 샛길’로 들어섰다. ‘철학자의 길’ 조각상 앞에 서서 한참동안 옆구리에 책을 끼고 서 있는 동판 조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끝내 ‘선비의 길’ 중간쯤에서 짚불처럼 흐물흐물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쓰러진 것을 본 정애는 목청껏 엄마를 외쳐 부르며 뛰어갔다. 길 복판에 쓰러진 어머니를 안고 휴대폰을 꺼내 다급하게 119를 눌렀다. 어머니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딸을 보더니 소스라지듯 놀랐다. 그리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어디가 아파? ”
정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으나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구급차 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정애는 이날 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의 눈물을 본 정애는 오목가슴을 후벼 파듯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그동안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정애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정애는 그런 어머니를 바위처럼 강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아픔 때문일까,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가 자아낸 통한의 눈물일까. 통한이라면 어머니의 삶에서 무엇이 그렇게 눈물 나도록 후회스러운 것일까. 

“엄마, 어디가 아파서 자꾸 울어? ”
정애가 거듭 묻자 어머니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한 달 전, 어머니의 82회 생신을 맞은 날 아침이었다. 정애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조촐하지만 정성스럽게 생일상을 마련하고 혼자 손뼉을 치며 축하 노래까지 불러주었다. 오동례 여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침드라마 <그대 있음에>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서둘러 TV를 켜놓고 아침을 먹었다. 70대 노부부의 사랑과 죽음을 내용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홀로 남은 남편이 따라 죽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때 어머니가 갑자기 음식을 먹다 말고 수저를 팽개치듯 상에 놓더니, “나는 헛살았다.”하고 큰소리로 탄식하는 게 아니겠는가. 정애는 생일상이 부실하거나, 외손자들로부터 축하 전화 한마디 없어 서운해서인가 싶어,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네가 알다시피 이 에미는 시퍼렇게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예순 살이 될 때꺼정 화장실 청소부로 일해서 너를 대학원도 보내고 결혼을 시켰다. 네가 결혼을 해서야, 나도 좀 편허게 살고 싶어서 청소부를 그만 두었지야. 화장실 청소부로 일을 허면서 온갖 수모 당헐 때마다, 너만 시집가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참아냈제. 고로코롬 억척시럽게 살았는디, 이제 와서 생각해본께, 내 평생에 누구 한 번 찐덥게 좋아해보지도 못 했고, 또 누구헌테 눈물나게 사랑 한 번 받아보지도 못했으니, 참말로 헛살았구나 싶구나.”
 오동례 여사는 갑자기 풀이 죽어 심드렁해지더니 벽에 등을 기댄 체 두 발을 쭉 뻗고 앉았다. 그때서야 정애는 헛살았다는 어머니의 푸념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 이 소설은 담양 죽녹원과 관방제를 무대로 쓴 작품으로, 2006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것을 작가의 양해를 얻어 재수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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