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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창간기념 기획연재(소설)/소쇄원에서 꿈을 꾸다(16)

“그러고 보니 정암 선생한테는 안 된 일이다만 네가 한양에서 내려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묘사화가 없었더라면 네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는 혼인시킬 생각을 못했을 것 아니냐. 그리 되었다면 진사 댁 따님도 다른 혼처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창암공은 얼굴에 회색을 감추지 못하고 희끗희끗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님 뜻대로 혼인을 하겠습니다만 소자에게 청이 있습니다.”
“청이라? ”
“예. 소자 관례를 치른 후에도 집에서 학업에 열중하겠으나 출사를 위해 과거는 보지 않을 생각이니 그리 알아주십시오. 그러고... 장차 지석천 계류에 운림을 조성하고 별서를 지을 생각이니 허락하여주십시오.”
양산보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만면에 희색이 넘치던 아버지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졌다.

“별서를 짓는 것은 허락하마. 허나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은 훈구대신들이 득세를 하고 있지만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더냐. 사림이 다시 힘을 얻으면 세상은 또 변할 것이니라. 그 때가 되면 네 생각도 달라질 것이 아니냐. ”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벼슬길에 나아가서 나라를 경영하는 것만이 대장부의 길이 아닙니다. 남송 주희처럼 이상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 또한 군자의 도가 아닌가 합니다.”

양산보의 생각은 완강했다. 그는 사림들 세상이 다시 온다고 해도 출사할 생각은 갖지 않았다. 스승이 사약을 받고 쓰러졌을 때 이미 그렇게 결심을 했었다. 창암공은 당장 아들의 생각을 꺾으려하지 않았다. 우선은 아들의 마음을 다독여서 서둘러 성혼시키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창암공은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청혼서를 보내자 즉각 허혼서가 왔고 이에 지체하지 않고 사성을 보냈다. 창암공과는 달리 그의 아내 송씨 부인은 진사 댁과의 혼사를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씨 부인이 원효사 법일 스님을 찾아가 궁합을 보았는데 처자가 누구와 혼인을 해도 단명할 운세를 타고 났다는 거였다. 다행인 것은 아들 셋은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이 정한 거여. 자식 셋을 둔다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이.”
창암공은 처자의 단명 운세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명문 김 진사 댁과 혼인을 맺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

 양산보는 결국 아버지의 닦달로 그해 가을에 김윤제의 누이동생과 혼인을 하게 되었고 6년 사이에 아들 셋을 낳았다. 지금 양산보는 스물넷이고 그의 아내 김 씨는 스물 하나다. 양산보는 큰 아들 자홍과 둘째 자징을 낳자 계획했던 대로 지석천 주변을 가꾸기 시작했다. 먼저 창암바위에서부터 왕대 숲 사이로 흐르는 계류를 따라 큰 오동나무가 서 있는 작은 둔덕까지 길을 냈다. 오동나무 앞에 조그마한 초정을 짓고 봉황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대봉대 라는 이름을 붙였다. 양산보는 날마다 초정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문인주는 초정에 앉아 있는 양산보를 보았다. 대나무 숲 사이를 지나 먼발치에서도 양산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유건에 도포차림의 그는 풍채가 더 의젓해진 것 같았다. 문인주는 조심스럽게 대봉대로 다가갔다. 양산보는 문인주가 다가오고 있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오동나무 우듬지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문인주는 대봉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지척지간에서 양산보의 얼굴을 짯짯이 들여다보았다. 전에 비해 얼굴에 분노와 비애가 사라져 한결 해맑고 편안해 보였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원림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의 평정을 찾은 듯싶었다.

“선비님, 오늘도 봉황새를 기다리십니까? ”
문인주는 양산보의 나이가 자신에 비해 반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옛날 사람이라서 존댓말로 넌지시 물었다. 그 때서야 양산보는 오동나무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 앞에 바투 선 문인주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선비님께서는 오동나무 열매만 먹고 대나무 잎에 맺힌 이슬만 먹는다는 봉황새를 기다리신다면서요? ”
문인주가 재우쳐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게요?”
양산보 역시 존댓말로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봉황새가 날아오리라는 것을 믿고 계십니까?”
“믿어야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믿고 있소.”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
“그래도 믿고 사는 게지요.”
“봉황새를 본 사람이 없다는데 처사님께서는 보신 적은 있나요? ”
“보았지요. 암, 보고말고요.”
“봉황새가 사람입니까? 사람이라면 누굽니까요? 요순 같은 성군인가요, 아니면 정암 스승인가요? 그도 저도 아니면 뜻이 맞는 친구들인가요.”

문인주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 양산보는 고개를 들어 다시 오동나무 우듬지에 눈길을 매달았다. 문인주는 양산보가 더 이상 그와 말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어렵게 만난 그를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 기회에 오래 전부터 양산보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의문들을 풀고 싶었다.

“처사님께서는 한양에 올라가서 정암 스승과 겨우 이 년 동안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동안 정암 스승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을 잃었다고 해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이렇듯 철저하게 세상과 절연하고 은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학업을 계속해서 벼슬길에 나가고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을 바꾸는 일에 일신을 바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생각이 올바르고 패기 넘치는 선비님 같은 분이 세상을 외면하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과연 군자의 길일까요? ”

 양산보는 날카로운 눈으로 문인주를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문인주는 잔뜩 긴장하고 양산보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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