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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천년 특별기획Ⅳ /추억의 우리동네(2)-대치리 '대장간'“옛 대장간 기억하세요?” (대전면 대치리 ‘영생대장간’)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중입니다. 이번호에서는 <추억의 우리동네 (2)> 편을 게재합니다.
 <추억의 우리동네> 편에서는 우리가 나고 자란 고향의 동네에 얽힌 사연과 추억들을 되새김 하면서 그시절 이야기와 기념이 될 만한 건물들을 기록으로, 또 미래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소개하는 기획특집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군민여러분이 살던 동네와 관련한 추억거리와 들려주고픈 이야기, 간직해야 할 동네의 유산이 있다면 담양뉴스에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한 동네에 8개마을 형성, 그래서 대치리
대치4리 남부마을에 대치시장, 그곳에 아직 ‘대장간’ 있어....
81세 정종규 옹, 64년째 대장장이로 일해
“아직은 할만 해, 힘 닿는데 까지 대장간 일 해야제!”

담양 대전면 대치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듯 예전부터 상당히 큰 마을이 형성됐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도 대치1리∼대치8리 까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신남,원촌,대조 마을까지 한 동네에 8개 마을을 유지하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큰 마을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예로부터 대치리는 영천이씨들이 입향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으며, 점차 손을 늘려가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인근으로 확대되면서 현재의 8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8개 마을 중 하나인 대치4리 남부마을의 한 가운데에 1919년에 최초로 문을 연 대치시장이 있으니 지금까지 3일, 8일에 5일장이 열리고 있다. 남부마을에는 시장 외에도 옛날에는 울창한 솔밭이 있어 솔밑, 송정이라 불렸고 일제때는 도축장 건물도 있었다. 오랫동안 가동해왔던 도정공장도 송정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대전면사무소와 대치시장이 있어 대치리 8개마을 중 가장 규모가 큰 마을에 속한다

이곳 대치4리 남부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대치시장은 예로부터 인근 수북,봉산 등 담양은 물론 장성 비아,진원을 포함한 사방 30리 사람들이 왕래하며 상업과 교역을 하던 곳이니 꽤나 큰 시장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대치시장의 여러 가게와 노점, 장옥들 중에서 지금까지 수십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명물이 있으니 바로 ‘대장간’ 이다.

대치시장의 명물이자 터주대감 격인 이 대장간의 대장장이 정종규 옹(81세).
올해로 64년째 대장장이로 살고 있는 정종규 옹의 대장간 상호는 ‘영생기업(철물/대장간)’ 이지만 간판은 달지 않았다. 요즘엔 시골 시장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곳이 대장간인데, 이곳 대치시장의 영생대장간은 검게 그을린 묵은 때를 그대로 간직한 채 반세기 이상의 세월동안 화로의 불이 꺼지지 않고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17살 때 대장간 일을 처음 배웠지. 그때는 수북 풍수리에 대장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김귀득 대장장이 한테 일을 배웠어. 나 한텐 스승님이라고 해야겄제. 그는 또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대장장이 한테 배웠고.... 헌디 김귀득은 몇가지 한정된 기술만 있었어. 호미,낫,칼,쇠스랑 같은 이런 것만 만들었제. 나는 대치시장에서 대장간을 연 뒤로 이런 허드레 농기구 말고도 여러 가지 것을 고안해서 만들었는디, 당시에 못하는 것 없이 뭐든지 고치고 수선하고 만들고 해서 사람들이 그래서 나한테 많이 찾아왔어. 돈도 많이 벌어서 얘들 다 가르쳤제.”

정종규 옹이 당시를 회상하며 들려준 말이다.
그는 17살에 수북 풍수리 김귀득 대장장이 에게서 대장간 일을 배워 3년간 함께 있다가 21살에 입대, 군대에서 전역한 뒤 3년을 더 풍수리 대장간에서 일하고 독립, 27살 때 대치시장에 자신의 대장간을 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줄곧 대장장이를 하고 있으니 올해로 54년째 이다.

당시엔 농촌까지는 산업화, 기계화가 덜된 시절이라 농기구도 직접 만들어 써야 했기에 새벽 5시에 일어나 해질녘까지 쉬지 않고 풀무질,메질,망치질, 담금질을 해야 하루 50개의 낫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낫 하나 만드는데도 12번의 불질과 담금질 등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품이 된다고 했다. 지금은 원재료를 절단해서 쓰기 때문에 8번이면 된다고 했다.

당시 호미,낫,칼(부엌칼,대칼),삽,괭이,쇠스랑 등 농사에 쓰이는 농기구를 주로 만들었지만 정 옹의 대장간에서는 화덕용 솥에서부터 수레까지 무쇠를 두들겨 만드는 것은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농기구는 물론이고 자전거, 구루마, 수레 등을 고치고 수선하는 일까지 대장간에서 모두 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공업사’ 였다.

대장간을 찾는 이들은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었지만 정 옹의 대장간은 주로 도매상들이 단골손님 이었다. 도매상들은 정 옹에게서 물건을 대량 사다가 담양과 인근 장성,영광,순창,남원,광산 등 여러곳의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았다. 한마디로 대치시장의 정종규 대장간은 근동에서는 가장 큰 대장간 이었던 것이다.

“몇년전까지 순창에 하나, 장성에 하나 대장간이 있었는디 순창은 없어졌고, 장성은 장날에만 문을 열어. 남원에는 4개가 있는디. 요새는 주로 기계로 하제 나처럼 손작업 하는 대장간을 찾아보기 힘들어....요즘엔 강원도에 가도 대장간 구경하기 힘들 것이네. 이제 나이 80 넘어서 대신 해줄 사람도 없고 힘 닿는데 까지 대장간 일을 하는 수 밖에 없지. 하지만 아직도 대장간 일이 즐겁고 아직은 할만 해...”
대장간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정종규 옹은 평생 해 온 일이라 대장간 일이 아직도 즐겁다며 미소 지었다.
 
2018담양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우리는 전통 농경문화의 유산인 ‘대장간’이 아직도 우리 담양에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아직까지 시골장터에서 옛 모습을 온전히 갖춘 대장간을 유지하고 있는 대전면 대치시장의 ‘영생대장간’ 과 ‘정종규 대장장이’에 대한 ‘전통인증’과 함께 ‘미래유산’ 지정, 무형문화재 추진, 그리고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관광자원화 작업이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장광호 기자

<대장간>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대장장이’ 라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필수적이었다.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그 밖에 모루·메·망치·집게 등의 연장이 있었다.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과 담금질을 계속한다. 그런 다음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시우쇠를 토막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한다. 깜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수메(슴베:손잡이 속에 들어간 부분)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다음에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를 박는다.

전통적인 대장장이가 호미 하나를 만드는 시간은 줄잡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로 제작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대장장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은 대장간과 대장장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그림=조선시대 김홍도 作 '대장간')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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