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뉴스 창간4주년 기획연재Ⅲ(소설)/소쇄원의 피로인(제5화)

<제5화>

“그토록 비싼 보물을 그대가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
이경직은 눈을 말똥히 뜨고 몽린을 노려보았다. 한갓 피로인 주제에 일본 대신이나 소유가 가능한 명품을 가지고 있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무슨 음모가 있지 않는가, 하는 눈빛이었다. 몽린은 금 보자기 위에 올려놓은 사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아직 보물이 아닙니다.”
“정호다완인데 명물이 아니라고?”
“맞습니다. 이 사발은 한때 저와 함께 다도를 배웠던, 오사카의 상인, 다케다 기자에몬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이름 붙여서 기자에몬이도라 불렀지요. 그의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에 명품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덕분에 제가 고향에 돌아가려고 수십 년간 모아 둔 금전으로 이것을 살 수 있었고.”
“귀인이 소지해야 비싸진다?”
“그렇습니다. 히데요시 같은 대영주나 센 리큐 같은 명사가 애용해야 비로소 명품으로 인정받는 것이지요.”
몽린은 잔잔히 말하고 나서 씩 웃었다. 죽음을 넘나들며 살아온 탓일까…… 오랜만에 몽린를 만난 강우성이 보기에 그의 자태나 말투에서 생사를 초극한 무념무상이, 때로는 냉소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것을 진상해 봐야 쓸모가 없다는 소린데……. 세상에서 보물로 인정 받지 못하는데 혼다 대신이라고 이것을 덥석 받을까?”
오윤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몽린은 다솔로 능숙하게 녹차를 저어 안개 같은 거품을 만들었다. 맛은 그렇다 치고 날씨가 더우니 연둣빛 녹차가 시원스레 느껴지기는 했다.
“혼다 마사즈미는 본디 문관 출신으로 다도에 능합니다. 지금 다도계를 이끄는 코보리 엔슈 등 다인과 교류도 많아서 제가 이 기자에몬이도의 가치를 설명하면 알아들을 것입니다.”
“혼다 대신을 만나는 날 그대가 동행해서 이 사발을 보여주겠다…….”
“예.”

오윤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였다. 피로인 숫자가 너무 적으면 후환이 두려웠다. 그렇잖아도 그는 출세가 늦은 편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왕릉을 지키는 참봉이나 하고 있다가 마흔이 다 돼 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들어섰다. 모난 구석이 없어서 조정에서도 평판이 무난한데 이 일로 출세에 지장이 올 수도 있었다.
“혼다 대신이 언제쯤 내방한다고 하더냐?”
“이틀 후이옵니다.”

강우성은 힘 주어 답했다. 일이 잘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죽마고우와 함께 귀환하고 싶었다. 마사즈미는 막부를 사실상 좌우하는 네 명의 집정 중에서도 현재의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신임이 가장 높다. 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선대 쇼군인 이에야스의 두뇌 역할을 했듯이 마사즈미도 사실상 히데타다의 명령을 좌지우지하는 중신이다. 그가 이 사발의 가치를 알아보고 유시문을 써 일본66주 영주들에게 예하 포로를 돌려보내도록 지시한다면 사오백 명쯤은 쇄환할 수 있을 법했다.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파루가 길게 울려 퍼졌다. 침소에 들어야 할 시간임을 깨달은 오윤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기 오는 뱃길에서 그대처럼 열 대여섯에 피납된 자들을 꽤 만났는데…… 거지반 왜인이 다 돼 돌아갈 마음이 없던데…… 그대가 그토록 귀환하려는 연유가 따로 있는가? 그대는 영주의 다두이니까 다른 피로인보다 편히 여생을 마칠 것이고 이 사발이 유명해지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는데…… 이 보물을 흔쾌히 내놓는 까닭이?”
“있지요. 지난 스무 해 동안 변치 않았던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몽린은 오윤겸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불쑥 답했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잠시 촛불 주변을 맴도는 불나방을 응시했다. 그것은 찌직찌직 한 쪽 날개가 타는데 연신 날갯짓을 한다. 빛이 없으면 날지 못하니까 타오르는 한이 있어도 불꽃에 몸을 던진다. 죽음의 두려움보다 날아 오르려는 바램이 더 간절함이다.
“저도이나방처럼오직하나,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텨 왔지요.”
몽린은 날개가 타 버려서 더 날지 못한 채 촛농 속에서 바동대는 나방을 어루만졌다. 그가 살아 온 시간을 더듬듯이. 이어지는 그의 음성이 좀 떨었다.
“제가 돌아가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리가 있어 사람이다, 라는 소쇄옹의 말씀입니다. 제가 소학을 배울 때 아버님은 도리가 없는 세상은 짐승이나 사는 곳이다, 사람은 도리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할아버님의 말씀을 늘 가르쳤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기개 높은 선비로 평가 받는,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한 양산보는 지나치리만큼 성리학의 도학 사상에 심취했다. 그 가르침은 오상(인의예지신) 같은 도덕률을 지고의 가치로 둔다. 반면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는데 주력한다. 그 사상은 물욕과 사람의 도리는 함께 하지 못한다고 본다. 양산보 같은 유학자는 인간의 기氣를 이루는 칠정(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연정, 미움, 욕망)을 다스려야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고 믿었고 그 깨달음을 스스로 실천하고 후손에게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일어나자마자 망부의 사랑채로 가서 그분이 불러 주는 대로 붓글씨를 썼지요. 이익을 이웃과 나누라, 가난한 백성의 땅을 헐값에 사지 마라, 주변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보살펴라 등등…….”
이경직은 소피를 보러 가는 척 방문을 나섰다. 밤이 늦어 그만 잠들려는 모양이었다. 오윤겸이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사서오경을 배운 아버지는 명품에 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과 그런 자들이 사는 땅의 혼란을 꿰뚫어 보았던 듯합니다. 도리가 스러지면 물욕이 일어선다고, 그런 세상은 위험하다고 늘 말씀하셨으니까요.”
“…….”
“한데 저는 망부가 말씀하신 그런 땅, 아귀도를 보았습니다! 바로 여기 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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