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신의 찻사발-마무리>

대마도는 쌀, 채소 등 농작물을 재배할 농토가 없어서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했다. 한때는 경상도 대마주 병마도절제사라는 관직을 받아 조선 왕의 신하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일본 본토에서는 스스로를 왜인이라고 하고 조선에 오면 반은 조선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요시나리도 상관인 오윤겸에게 깍듯이 대하고는 있는데 한편으로는 수시로 쇄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막부에 고하는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왜승이 찾아와 오랫동안 밀담을 나누고 가니까 정체가 수상해서 몽린을 뒤쫓도록 했을 법했다. 
몽린은 먹물을 뿌린 듯 검측한 밤하늘을 오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희미한 초승달이 오스스 떨도록 차가운 냉기를 뿌렸다.

■<타오르는 소쇄원>

정사년(1617년) 8월21일. 조선의 쇄환사, 오윤겸은 쇼군이 제공한 가마를 타고 요도에서 약 40리를 이동해 쿄토의 다이토쿠사에 들어갔다. 며칠 후 쇼군을 접견할 예정인데 그 동안 이곳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이 절은 히데요시의 다두였던 센 리큐와 그의 스승이 여기서 다도를 완성했다 하여 일본 다도의 성지로 불렸다. 
일본은 서예, 꽃꽂이, 차 마시기 등 모든 일상 활동까지 격식과 규범을 중시했고 이런 형식을 도(道)라고 불렀다. 차 마시는 방법을 하나부터 열까지 규범화하고 이를 따랐는데 이런 절차를 완성한 사람이 센 리큐다. 그는 이 다이토쿠사의 누각에 자신의 목상을 안치했고 히데요시가 그 아래를 지나다녔다. 그에게 다도를 배우는 영주들이 늘어나고 지나치게 신성화되자 질투심을 느낀 히데요시가 할복을 명했다.

요도에서 쿄토의 입구인 쿄토사 사이는 온통 대숲과 민가로 들어차 있는데 조선에서 사신이 수백 명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구경꾼이 몰려들어서 장관이었다. 이어 쿄토사에서 다이토쿠사에 이르는 거리는 시전, 유곽, 절, 영주의 저택인데 그곳에도 왜인이 몰려들어 꽹과리를 치고 함성을 질러서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사들의 환영식을 연상시켰다. 
몽린은 미시(오후3시)가 넘어설 때쯤 오윤겸 일행이 지나가는 길거리의 다옥에 자리잡고 앉아 강우성을 기다렸다. 왜국의 가을걷이는 여름이 채 가기 전에 여물고 있었다. 정원 한 켠에 고즈넉이 선 밤나무에서는 밤송이가 아람이 벌어졌고 이름도 모르는 가을꽃 봉오리가 올망졸망 벙글었다. 
쿄토에는 워낙 사찰이 많아서 왜승들로 북적였다.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는 몽린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설혹 부랑자와 시비가 붙어도 주조지마의 영주인 야스하루의 다두라고 하면 예, 예 굽실거리며 물러나곤 했다.

돌이켜 보면 은개 덕분에 다른 피로인과 달리 우리 가족은 편히 살아왔구나…….
문득 강우성을 만나 회포를 푼다고 생각하자 창평에서 당숙들과 함께왜병을 상대로 싸웠던 일, 혜란의 몸종이었던 은개 덕분에 혜란과 어머니가 화를 면했던 일, 피납돼 야스하루의 성채인 안골포에서 지냈던 일, 처음 일본에 건너와 야스하루의 시동으로 다도를 배우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조금 있으면 동생 혜란도 올 예정이었다. 13세에 납치된 혜란은 이제 서른 살이 넘어 성숙미가 물씬했다. 혜란과 어머니는 일본에 도착했을 때부터 야스하루의 정실을 모시는 시녀로 일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영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쿄토에 은거 중인 야스하루를 따라와 현재는 겐쇼인이라는 법명으로 불리고 있는데 모녀를 놓아줄 뜻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면 관례에 따라 혜란과 어머니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돼야 했다. 몽린이 올해 쇄환사를 따라 기필코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데는 혜란과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왜국의 절간에서 여생을 마치야 하는 혜란의 운명을 떠올릴 때마다 몽린은 분노가 치밀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삶을 강요하는 운명의 장난이 잔밉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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