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추를 정식하는 날이다. 오늘을 위해 남편은 요 며칠 된통 고생했다.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 혼자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나도 곁에서 도왔지만 아낙네가 할 수 있는 건 가벼운 것을 나르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보조를 하는 등 쉬운 일에 불과하다. 기계를 다루고 무거운 자재를 운반하는 것 등은 어쩔 수 없이 남편 몫이다. 뙤약볕 아래서 고생하는 남편을 보고 있노라면 귀농한 게 잘한 일인지 살짝 후회가 된다. 

남편의 어깨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려고 나름의 스케줄을 세우고 실천했다.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했던 현장실습반 교육을 수료했다. 파종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직접 재배하는 과정이었다. 관리기와 소형 트랙터를 운전하는 교육도 받았다. 여자가 농기계를 다룬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직접 운전하니 느낌이 색달랐다. 쌈채소와 방울토마토를 심어 수확까지 경험했다. 열심히 배웠고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남편이 발 벗고 나서서 하다 보니 자잘한 일을 할 뿐이다. 

내가 귀농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귀농하기 전 담양과 가까운 광주에서 살았다. 보통사람 처럼 아르바이트 하고, 직장도 다녔다.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친정에 가서 엄마에게 하소연했다. 그때 엄마가 물었다. 차라리 농사를 짓는 게 어떻겠냐고.
엄마 말이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식들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게 하려고 허리띠 조여 가며 교육 시키고, 도시로 보내려고 아등바등 살아오신 분이었다. 농사는 짓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엄마가 차라리 농사를 지어보라니. 딸의 하소연에 푸념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사짓는 것보다는 나으니, 불평 말고 계속 근무하라는 말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인 줄 알았다. 

엄마는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엄마의 하얀 얼굴을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캠벨을 수십 년째 재배했지만 갈수록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캠벨이 돈이 안 될 거라고 판단한 분들은 캠벨을 갈아엎고 샤인머스켓을 심었다. 농사가 갈수록 힘들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음에도 딸에게 농사를 권유한 것이다. 직장생활을 불평하는 딸을 달래는 말일 거라고 받아들였는데 아니었다. 자주, 강하게, 추천했다. 엄마가 그렇게 나오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농사를 지을 테니 시간 날 때 도와줄 수 있는지를. 남편이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마지못해 한 말이 아니었다. 남편도 적극적으로 권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남편한테 푼 적이 없었는데, 남편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만두라고 할 수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남편의 찬성으로 귀농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추농사 하우스

고추를 선택했다. 담양은 딸기를 하는 농가가 가장 많다. 담양 딸기는 전국적으로도 인지도가 높다. 딸기를 재배하면 알려주실 분들이 지근거리에 허다하다. 소득 또한 비교적 안정적이다. 귀농하겠다니 딸기를 권하신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고추를 선택했다. 딸기를 재배하려면 재배시설이 필요한데, 적은 돈도 아니고, 기술력도 없어 겁이 났다. 투자 않고 하는 농사부터 해볼 생각에 고추를 선택한 것이다.

논 한 단지에 고추만 심었다. 첫해는 고추를 제법 수확했다. 하지만 물정을 몰라 헐값에 넘기고 말았다. 그래도 짭짤했다.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고, 노력한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고, 개인 시간이 넉넉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농사는 모를 일이었다. 다음 해에는 탄저병으로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추만을 생각했다.

내가 농사짓는 것을 보고, 엄마가 캠벨을 갈아엎었다. 그 자리에 고추를 심으라고 했다. 억척스럽게 일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 
고추 모종을 정성스레 심었다. 온종일 모종을 심느라 몸이 잘 익은 파김치처럼 축 늘어졌다. 숟가락 들 힘도 없다. 걱정도 앞선다. 올해도 탄저병이나 역병, 바이러스 등으로 농사를 망칠지 모른다. 남편 얼굴을 보니 새까맣게 그을렸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눈만 남기고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면을 쓰고, 썬크림을 두툼하게 바르고 일했어도 얼굴이 새까매졌다. 고생했다는 안타까움보다 건강함을 느낀다. 잘 자라겠지. 정식한 고추가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고추를 심고 나니 늦둥이를 얻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슴 가득한 포만감을 느낀다./강성오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강성오 군민기자  webmaster@d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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