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혜란의 생각에 이마를 찌푸리는데 강우성이 능숙한 왜어를 찌걸이며 들어섰다. 꽃무늬가 화사한 비단 하카마에 다인들이 쓰는 두건까지 그럴 듯하게 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재물 좀 모아 둔 왜 상인 품새였다.
“히데요시 가문을 아예 작살을 냈구먼.”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오사카에서 쿄토에 이르는 길에 부잣집이 십만 간에 이른다고 소문날 정도로 번성했다. 2년 전에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공격해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 자결하고 인근 마을은 폐허가 됐다.
강우성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냉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그는 호조에서 주학 교수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한성에서 살다가11세 되던 임진년(1592년)에 납치돼 일본에 왔다. 어린 애가 부모도 없이 홀로 타국에 왔으니 오사카 시전에서 거의 거렁뱅이나 다름없이 몇 년을 보냈다고 했다. 본디 눈치가 빠르고 붙임성이 좋아서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는 성품이다. 오사카 인근의 사카이에서 차 도구를 파는 왜상인의 눈에 들어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동안에 다도를 배우려 사카이에 드나들던 몽린과 만났다. 한 살 터울이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고 강우성이 조선으로 귀환한 뒤에도15년이 넘도록 몰래 서찰을 주고 받았다. 땀이 식기도 전에 몽린은 다급한 마음에 말을 건넸다.

“쇼군과 면담 일자가 잡혔는가?”
“26일쯤이라고 하던데.”
“혼다님과의 만남은?”
“아마 모레쯤일 거야.”
“한데 그 대신이 그대가 주려는 정호다완에 대해 잘 알까? 사발의 가치를 모르면 우리 계략이 헛일인데…….”
“오리베님 같은 다두에게 배웠으니까 알아 볼 것이야.”
몽린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타 오리베님는 히데요시의 다두인 센리큐가7대 무사 제자 중에서 가장 아꼈던 무장이다. 야스하루가 참여했던 다회에서 몽린도 먼 발치로 본 적이 있었다. 에도 막부의 다도 사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혼다도 그에게서 다도를 배웠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참으로 궁금한 것이 한가지 있네. 이녁은 다도를 정식으로 배웠으니까 물어보는 것이네.”
“무엇을?”
“참으로 그 정호다완이 여기 이 그릇과 차이가 큰 것인가? 다른 조선 사발도 널렸는데 왜인들이 유독 그 찻사발을 대명물이라 하여 매달리는 내막을 잘 모르겠구먼.”

강우성은 빈 말차 잔을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원래 재간이 많아서 꾀돌이라 불렸던 젊은이다. 몽린은 문득 친구가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다.
조선에서 큰 부자는 지배층인 양반이 아니다. 중인 신분인 역관과 의원이 거부였다. 역관은 명나라나 일본에 가는 사신을 따라 다니면서 밀무역으로 돈을 모았다. 그들이 왜인들에게 가져가는 물건은 표피, 채화석, 면포, 저포인데 그중 값진 것이 인삼과 중국 비단이었다.
강우성도 원래는 부친을 따라 주학 시험에 응시해 주사(籌士)로 일했다고 들었다. 수치나 계산하는 따분한 관직에 질려 다시 역관 시험을 통과해 동래부 훈도로 일해왔다. 조선에서 역관은 중인 계급이다. 말 그대로 항상 중간쯤에 앉아야 하는 사람이다. 사대부들 앞에 서면 안되고 그들 뒤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어느 돈이 많은 역관은 집을 너무 크게 지었다가 되려 사대부들에게 욕을 왕창 먹고 다른 곳으로 쫓겨갔다. 역관으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중인은 자손대대로 굽실거리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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